어디론가 불쑥 떠나기를 즐겼던 나지만 언젠가부터 여행이 부담스럽게, 혹은 귀찮게 느껴졌다. 두 가지 정도의 이유를 꼽을 수 있겠다. 첫째로는 아프면서 신경 쓸 것이 많아졌다는 것.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먹었던 과거와 다르게 아침으로 먹을 엄마표 토마토 스튜를 챙기고 그나마 건강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을 검색한다거나, 가발, 바르는 연고, 복용하는 약, 성분이 좋은 샴푸와 바디샴푸 등을 꼼꼼히 넣다 보면 가방이 무거워진다. 최근에서야 알게 된 두 번째 이유는 나는 타인을 배려하느라 꽤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누군가와 여행을 함께 가면 혼자 있는 시간이 절실히 필요해진다는 것.
월요일 아침, 망설이던 내가 짐을 싸기 시작한 건 언젠가 친구가 편지를 통해 소개했던 '굳이 데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낭만을 찾으려면 귀찮음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무언가를 굳이 하는 날을 가지라는 것. 기왕이면 혼자 가보자. 처음 해보는 장거리 운전이고, 운전이 편안하지도 않은 나로서는 용기를 끌어모은 결정이었다. 다행스럽고 기쁘게도, 결과는 대만족이다.
첫째 날, 차 안은 덥다고 느껴질 만큼 쨍쨍한 날이었으나 백두대간을 통과하는 인제양양터널을 벗어나자 급격히 날씨가 흐려지더니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졌다. 오, 주님. 부디 무사히 숙소까지 갈 수 있게 해 주세요. 운전대를 잡을 때면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신에게 매달리는 나는 그렇게 기도했다. 다행히 비는 금방 잦아들었고, 차에서 내릴 때쯤에는 우산이 없다는 걱정도 필요 없어졌다. 비가 그쳤으니까. 그렇게 나의 혼여(혼자 여행)가 시작되었다.
첫날은 숙소에서 얌전히 쉬었다. 그러려고 편의 시설이 모두 있는 호텔을 예약한 거니까.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방에서 소설도 쓰고, 멍도 때렸다. 인생 처음 누군가에게 글을 보여주고 평가를 받으면서 글에 어느 정도 구성이 필요하다는 걸 실감한 나는 나름대로 개요를 짜보느라 첫 줄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음에도 시원한 바닷바람이 닿았는지 집에서보다 훨씬 쉽게 첫 줄을 쓸 수 있었다. 결국은 어떻게든 시작하고 쓰는 게 그놈의 구성보다는 중요한 게 아닐까. 저녁으로는 숙소에 있는 식당에서 능이 효종갱이라는 메뉴를 먹었다. 능이, 전복, 소갈비가 들어간 해장국인데, 짜지 않았다. 집밥에 익숙해져 버린 나에게 맛의 기준은 짜냐 짜지 않냐가 되어 버렸으니, 정갈한 반찬까지 아주 만족스럽게 먹었다는 뜻이다.
숙소의 해변길을 걷고, 편의점을 구경한 뒤 당류가 아주 적게 함유된 과자 하나를 구매하고, 방으로 돌아왔을 즈음에는 온몸이 쑤셨다. 수술 후에는 조금만 무리하면 오른쪽 팔이 아프곤 했는데, 최대한 힘을 빼고 온다고 노력했는데도 핸들을 움켜쥐었던 건지 오른쪽 겨드랑이도 팔도 아팠다. 200km 정도를 운전하고 동시에 떠오른 건 오, 별거 아니네, 나도 할 수 있네, 하는 생각과 아이고, 피곤하다, 하는 생각이었다. 함께 강원도를 자주 왔었고 그때마다 운전을 도맡았던 전 연인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는데, 내가 혼자 여기까지 왔다고 자랑하고 싶기도 했고 그동안 나를 태워 다닌 데 대한 고마움이 들기도 했다. 아직 소화하지 못한 나만의 복잡한 생각들이 있지만 어쨌거나 그렇다고 좋았던 시간이 다 날아가는 건 아니니까. 폐기하거나 변색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보기로 했다. 실은 이 호텔의 식당에도 밥을 먹으러 함께 왔었다. 길을 찾지 못해 짜증을 내다 거의 싸울 뻔했는데, 혼자서 여유 있게 걸어 다니다 보니 숙소 안의 길은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역시 혼자가 좋군. 대체 왜 이 건물 저 건물 지하를 헤매고 다닌 거야. 나와서 찾으면 훨씬 쉬웠는데.
오션뷰의 호텔은 파도가 철석거리는 소리를 피할 길 없었다. 지하부터 5층까지 복도가 모두 뚫려 있는 건물의 특성상 늦은 시간까지 접시를 치우는 소리도 들렸다. 덕분에 나는 귀마개를 끼고, 묵주기도를 하며 신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결국에는 잠에 들었고.
둘째 날은 맑았다. 커튼을 여는 순간부터 미소가 지어질 만큼 바다도 하늘도 푸르렀다. 숙소에서 시간을 보내고, 유명하다는 햄버거 가게를 찾았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다 뭐 하는 사람들일까. 월요일 낮인데. 그렇게 생각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호텔과 달리 시내에는 차가 없었다. 햄버거 가게에 가는 10분 동안 앞뒤로 차가 없어서 창문을 열고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햄버거 맛은 그저 그랬지만, 한가하게 주차하고 배도 채웠으니 불만은 없었다. 다음으로는 속초나 양양에 오면 늘 가던 북카페를 찾았다. 그곳에서 소설이 많이 나아갔다. 다섯 페이지 정도 썼다. 배가 고프지는 않아 산책이라도 좀 해야겠다 싶어 찾은 하조대 해변은 아주아주 아름다웠다. 멀리서 물고기가 펄쩍하면서 뛰면 수십 마리의 뚠뚠한 갈매기들이 지켜보고 있다가 날아가 사냥했다. 수평선 가까이 내려온 태양 덕분에 반짝이는 윤슬을, 그것을 열심히 찍는 아저씨 두 분을 관찰할 수 있었고, 하늘이 핑크색으로 물드는 것도 즐길 수 있었다. 검정치마의 Hollywood와 더 발룬티어스의 Summer를 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름다운 노을과 거의 동의어가 되었을 만큼 나에게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노래들이다.
저녁으로는 양양 시장에 가서 옹심이를 먹었다. 바다를 좋아하는 마음과 달리 해산물이 입에 잘 맞지 않는 나로서 옹심이라는 음식은 아주 좋은 발견이었는데, 원래 가던 속초 시장의 옹심이와는 비할 바가 못 되었지만, 색다른 매력이 있었다. 어쩌다 찾아 처음 옹심이를 먹은 곳이 속초였는데 나는 어떻게 그런 맛집을 찾았던 걸까. 웃긴 건 직원분께 "양이 많나요? 감자전까지는 못 먹겠죠?"라고 물었을 때 "성인 남성분도 옹심이 하나만 먹어도 배불러하세요."라는 답변을 받아 옹심이만 시켰는데, 나는 한 그릇을 다 먹고도 배가 별로 부르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숙소로 돌아와 치킨 한 마리를 혼자 다 먹었다는 것. 나 왜 이렇게 잘 먹어? 치토스 치킨이 맛있대서 포장했다가 한 입 먹고 깜짝 놀라 튀김옷을 모두 벗겨 먹기는 했지만. 배가 꺼질 때까지 한참을 기다리고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렇게 오늘이 밝았다. 어김없이 덜그럭거리는 그릇 소리에 깨어 커튼을 열었는데,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가는 날 아쉬울까 봐 날이 이렇게 흐리구나. 나는 생각했다. 체크아웃을 하고 낙산 해변으로 향했다. 핸드드립을 하는 카페 앞 주차장을 간다는 게 500m 떨어진 주차장을 잘못 찍고 와버렸다. 차를 빼고 다시 대느니 이 정도는 좀 걸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해변을 걷기 시작했다. 먹구름은 농담이 아니었는지 맞바람이 매섭게 불었는데, 오른편에 있는 소나무 숲으로 들어가자 나무들이 나를 숨겨주었다. 가까운 곳에 차를 댔으면 몰랐을 포근함이었다. 속초에도 양양에도 이렇게 소나무 숲과 마주 보는 해변이 있는데,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둘은 생각보다 아주 잘 어우러진다. 간판을 내린 낡은 호텔과 새로 짓고 있는 건물의 건설 현장이 교차로 펼쳐졌는데, 저런 호텔 하나 사서 숙소를 열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물론 망할 가능성이 높겠지. 이렇게 사람이 없는데. 근데 혹시 또 알아? 공간만 괜찮으면 아무리 멀어도 찾아오는 게 사람들인데. 그런 여러 가지 상상을 하며 걸었다.
둘째 날부터 내가 만들어 차 열쇠에 걸어둔 비즈 키링은 여러 번 떨어졌는데, 또 떨어지면 양양에 선물할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주의하지 않고 주머니 밖으로 꺼내 달랑거리며 다녔다. 당연한 결과인지 모르지만 카페에 가는 길목 어딘가에서 기어이 키링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커피를 받고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 몇 걸음은 바닥을 무섭게 주시했다. 혹시 떨어뜨린 키링을 다시 찾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어디쯤에서 숲길로 들어섰고 어디쯤에서 해변가로 다시 걸어 나왔는지 아리송했다. 이렇게 좋은 곳에 와서 바닥만 보고 걸을 수는 없으니까 키링과 함께 바닥에 떨군 아쉬움을 어렵게 주워 챙겨 넣고 높은 파도와 조금은 맑아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좀 거창할지 몰라도 과거를 바라보는 시선과 현재에 어떤 마음을 남길 것인지, 삶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그렇듯 돌아가는 길은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이번에는 바람이 뒤에서 밀어줘서 조금 더 편안했고.
점심 식사를 하고 출발하려고 황탯국 맛집이라는 장소를 찾다 바로 옆 모텔 주차장으로 잘못 들어갔다. 그곳에 차를 두고 가도 아무도 몰랐을 것 같은데 어쩐지 찝찝한 마음에 어렵게 차를 돌려서 식당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상식을 가지고 어떤 원칙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너무 갑갑하게 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또 드는 순간이었다. 오, 그런데 식당 주차장에 양양에 있는 차는 다 와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사람이 많아서, 결국 휴게소에 가서 밥을 먹기로 결정하고 바로 고속도로를 탔다. 어쨌거나 황탯국을 먹을 운명이었는지 휴게소에서 황탯국을 먹었고, 이번에는 백두대간을 통과하자 깨끗해진 하늘에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 춘천에 있는 카페에 와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합평을 진행해 주셨던 작가님이 계속해서 쓰고 싶은 게 있는 것도 재능이라는 말을 해주셨는데, 오늘도 쓰고 싶은 게 많아서 소설은 잠시 접어두고 오랜만에 브런치에 글을 남긴다. 나 글 쓰고 싶은 재능이 있나 봐!
모쪼록 점점 한적해졌던 여행길과 다르게 귀갓길은 점점 혼잡해질 예정이니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또 한 번의 기도를 바친다. 올해는 좀 덜하거나 늦었다지만 여전히 알록달록한 가을의 단풍과 끊임없이 꺾여 기어이 나에게 다가오는 파도, 빛나는 윤슬과 경계 없는 하늘과 바다 사이, 그리고 눈치 보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만을 묻고 답을 찾아나갔던 나와의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곱게 접어 가슴에 담아 간다. 아쉬우면 어때! 다음에 또 오면 되지! 미래의 나에게 망설이지 말고 또 한 번의 여행을 떠나기를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