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보낸 위로
낯익은 피아노 선율이 들려온다. ‘아! 템페스트다.‘ 하던 일을 멈추고 음악에 집중한다. 가슴 한가운데서 폭풍 속 바다를 표류하는 난파선의 일렁임이 느껴진다. 마치 셰익스피어 희곡 <템페스트>의 한 장면처럼. 빠른 템포로 휘몰아치는 연주와 함께 감정은 요동치고 연주가 끝남과 동시에 폭풍이 물러간 새벽의 고요가 찾아든다. 오전 내내 요란하던 마음이 씻긴 듯 평온해졌다. 마음이 어지러운 날,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싫은 날, 가만히 누워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 귀를 제외한 모든 감각을 차단하고 음악에 집중하며. 그러다 귀를 관통해 마음으로 쑥 들어오는 음악이라도 만나게 되면 온 마음 가득 음악을 받아들여 감정을 흘려보내 본다. 음악이 위로가 되는 순간이다.
음악이 준 위로를 생각하며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르비츠를 떠올렸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책 <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를 읽고 만난 가슴 뛰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공산주의 체제하의 러시아를 떠난 후 50여 년의 망명 끝에 돌아와 열린 호르비츠의 <모스크바 귀환 리사이틀>. 그 역사적 순간, 압도적이고 화려한 테크닉을 자랑하던 노구의 피아니스트가 선택한 곡은 ‘슈만 어린이 정경 중 제7곡 [트로이메라이]‘였다. 특유의 가늘고 긴 손을 활짝 펼쳐 고향에서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듯 초연하게 꿈처럼 연주해 나가던 음악… 숨죽인 관중들과 회한을 공유하는 듯한 그날 공연의 메시지는 분명 ’위로‘였다.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실재 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듯한 순간. 우리는 그것을 ‘매지컬 모먼트‘라 부른다.
매지컬 모먼트.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봤을 그러나 모르고 지나쳤을 수도 있는 순간. 어느 날 갑자기 바로 그게 마법의 순간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내게도 있다. 아이에게 자장가로 들려줄 음악을 찾고 있던 중 알게 된 글렌 굴드가 연주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모차르트 스타일의 자장가는 취향이 아니었고 마음에 들었으나 슬프도록 아름다운 단조가 떠오르는 쇼팽을 내내 들려주기는 마음에 걸려 선택한 음악이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어느 백작을 위해 바흐가 작곡했다는 곡이 잠투정이 심한 아이에게 잘 맞을 것 같기도 했고 피아노의 기인이라 불리는 글렌 굴드에 대한 호기심도 한몫을 했다. 2개의 아리아와 30개의 변주곡으로 구성된 이 음악의 러닝 타임은 한 시간 가까이다. 아이의 긴 잠투정을 견뎌내야 하는 시간과 맞먹는 시간. 조용한 아리아로 시작된 피아노 선율은 다양하게 변주되며 잠들지 않는 아이 때문에 지치고 지루해지려는 마음을 붙잡는다. 마지막 아리아와 함께 연주가 끝날 때 즈음이면 아이의 새근대는 숨소리와 함께 음악으로 공명된 마법 같은 공간에 오롯이 혼자인 나를 발견한다. 그렇게 나는 바흐를 만나고 사랑하게 되었다. 제목을 알지 못해도 처음 만나는 곡이어도 괜찮았다. 하프시드 연주 특유의 경쾌한 마무리가 들리거나 무의식 중에 음악을 듣다 한없이 기뻐질 때면 어김없이 “바흐 작품번호 BMW ~번 연주입니다.”라는 라디오 진행자의 목소리가 들렸으니까. 부활절이 다가올 때 ‘바흐 칸타타 147번 [예수, 인류 소망의 기쁨]‘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길 기다리기도 하고, 마음이 울적한 날엔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으로 유명해진 ‘바흐 칸타타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어]‘를 몇 년째 질리지도 않고 들으며 ‘5분 10초‘의 마음속 깊은 평화를 누린다.
음악을 듣다 보면 노래 제목과 곡이 한참 동안 연결되지 않던 곡도 있었는데,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이 그랬다. 특히 2악장의 인상은 ‘비창‘이라는 단어에서 떠올린 애절함과는 다른 단정함과 아름다움이었는데 훨씬 나중에 이 곡이 만들어진 배경과 제목의 에피소드를 알고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숭고함과 점점 커지는 마음 같은 것이 느껴졌던 곡은 베토벤이 청력을 잃어가던 무렵 작곡된 곡으로 내면의 깊은 고통을 승화시키며 차분함과 비장함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그의 의지, 즉 ’비장함 속 환희’에 대해 노래한 곡이다. 번역의 오류로 비장함, 감동적인, 감격적인의 뜻이 ’비창’으로 굳어진 곡. 곡을 이해하고 나니 이 곡을 흘러가듯이 들을 수는 없었다. 고통에 침잠되지 않는 가슴속 깊은 의지와 섬세하면서도 격을 잃지 않으며 아름답게 나아가려 하는 정신을 공감한다는 것은 어떤 말로도 대신할 수 없는 위로다.
마음이 심란했던 서울행 기차 안에서 만난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헨델 프로젝트>에 실린 ‘헨델 모음곡 내림 나장조 4번 [미뉴에트]‘ 역시 음악의 섬세한 아름다움이 주는 위로를 느끼게 하는 곡이었다. 마음과 대조되는, 그래서 왠지 더 울적했던 차창 밖 맑은 하늘과 들판을 바라보며 듣던 조성진의 연주. 이어폰을 낀 순간 온몸을 울리는 피아노의 리듬과 기차의 진동을 따라 흔들리던 몸은 하나가 되고 우울한 마음 저 밑까지 내려가 슬픔마저 아름답게 만드는 음악의 힘에 빠져들었다. “딱 그 느낌이었다. 심장은 열려버린 듯, 머리는 비어버린 듯, 언제부터 눈물도 나고 그런 기분, 허락은 필요 없는 듯 어느새 성큼 다가온 음악“이라던 손열음의 책 <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의 한 구절이 선명히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랬다. 심장이 열려버려 눈물이 날 것만 같은 벅차오르는 기쁨이었다. 음악은 내게 그런 존재였다. 마음 밑바닥에 항상 도사리고 있는 너무 오래되어 나 같아져 버린 슬픔을 벅찬 기쁨으로 전환해 주는 마법 같은 존재.
‘베토벤 소나타 17번 라단조 [템페스트]‘에 이어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1악장‘ 도입부가 울려 퍼진다. 시작을 알리는 호른 네 대의 힘찬 울림과 함께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연주는 아름답고 강렬한 피아노 솔로로 이어지고, 연이어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하지만 모든 것을 포용하듯 밀려오는 바이올린의 협주… 마음은 부풀어 올라 차이콥스키의 선율을 타고 아득히 흘러가고…….
그래! 슬플 일이 뭐람, 이렇게 인생은 또 흘러가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