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하신 부분은 언제든 연락 주세요.
‘궁금하신 부분은 언제든 연락 주세요~’
저녁 9시가 넘은 회사에서 들리는 통화 맺음말이다.
광고 대행사에서 야근은,
예외가 아니라 전제다.
퇴근은 일이 끝나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새로운 브리프가 들어오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다.
밤 11시, 카톡 한 줄이 오늘의 야근을 내일로 연장한다.
출근 시간은 정해져 있다.
퇴근 시간은 없다.
업무시간 외에도 브리프는 언제든 들어온다.
그 순간부터 다시 시계가 돌아간다.
광고인의 하루는 근무와 비근무로 나뉘지 않는다.
응답과 대기로 나뉠 뿐이다.
이 구조 속에는 세대의 온도 차도 공존한다.
퇴근 시간이 지나도 엉덩이 붙이고 방망이 깎던 이전 세대.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요즘 세대.
그리고 그 사이에 낀, 퇴근도 못 하고 떠나지도 못하는 중간 세대.
같은 책상에 앉아 있지만,
각 세대는 서로 다른 꿈을 꾼다.
동상이몽. 같은 업을 하면서도 전혀 다른 시간관을 가진 채.
그리고 나는 그 중간 세대 어딘가에 서 있다.
저녁 9시가 지나서도,
“저 퇴근해 봐도 될까요… 약속이 있어서…”
윗사람의 눈치를 보며 기어들어가듯 말하던 과거의 나.
그리고 지금은,
“내일은 늦게까지 마무리를 해야 될 것 같아. 약속 있으면 미안하지만 취소해야 될 것 같아.”
아랫사람의 눈치를 보며 말하는 내가 돼 있다.
그때 날 바라보던 윗사람의 표정과,
지금 나를 바라보는 아랫사람의 표정은 다르지 않다.
한숨 섞인 그 얼굴.
참, 만감이 교차한다.
문제의 중심에는 클라이언트 종속이 있다.
광고주는 갑이고, 대행사는 을이다.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는 불안 속에서
“안 됩니다”라는 말은 사라진다.
결국 업계는 이렇게 운영되어 왔다.
“우린 24시간, 저렴하게 대응 가능하다.”
이 암묵적 제안 위에서.
그리고 문화적 고착이 뒤따른다.
“광고는 원래 그래. 힘들다 했잖아”
이 말들이 야근을 정당화한다.
개인의 성실성 문제가 아니다.
산업 구조의 문제다.
그런데 책임은 언제나 개인에게 전가된다.
요즘 세대는 이 구조를 정당하다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 열정이 남을 위해 소모되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내 시간과 감정을 갈아 넣어도 돌아오는 게 피곤뿐이라면,
그건 더 이상 꿈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광고는 그들에게 ‘선망의 직업’이 아니다.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아니라,
‘빨리 떠나야 하는 곳’이 된다.
해법은 업계 안에 없다.
개별 대행사가 권위를 쌓아도,
다른 곳이 더 싸고 더 빠르면 무너진다.
업계가 공동 규칙을 세워도,
깨지는 건 한순간이다.
결국 제도적 강제력이 필요하다.
프랑스에는 ‘퇴근 후 이메일 금지법’이 있다.
한국 광고업에도 같은 장치가 필요하다.
야간 브리프를 제한하고, 위반 기업을 제재하는 방식.
기업은 법을 우회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지와 신뢰의 타격을 감수해야 한다.
그 리스크는 결코 작지 않다.
광고는 창의성을 파는 업종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시간과 체력을 팔고 있다.
노동자의 시간이 존중되지 않는 광고에서,
소비자의 마음을 존중하는 크리에이티브가
과연 나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