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감정과 친해지는 법에 대하여
울지 마! 뚝!!
화내지 마! 짜증 부리지마!
어릴 적, 슬픔이나 분노, 짜증 등 부정적인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면 제지를 받았다.
물론 어리다는 이유로 귀엽게 보아주거나, 감정이 자연히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어른들도 가끔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부정적인 감정의 표출은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러한 감정들은 조절 또는 억압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자신의 기분을 함부로 내비치지 않는 아이가, 밝게 웃으며 말을 잘 듣는 아이가 '어른스럽다'는 칭찬을 받는 모습을 보며, 내 마음속엔 어느새 '감정을 누르는 것'이 곧 '감정 조절을 잘하는 사람' 이라는 공식이 새겨졌다.
하지만, 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보고 나서 내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다; 슬픔, 분노, 공포, 짜증 등 불편해서 외면해왔던 감정들도 기쁨 못지않은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내용을 통해 ‘부정적’ 감정들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영화 속 주인공 라일리의 머릿속에는 다섯 가지 감정이 상주한다;
기쁨이 (Joy)
까칠이 (Disgust)
버럭이 (Anger)
공포 (Fear)
슬픔이 (Sadness)
10년간 라일리의 삶에서, ‘기쁨이’는 나머지 감정들을 이끄는 리더 역할을 해왔다. 라일리가 어려운 일을 겪거나 실수를 해도 원래의 밝고 명랑한 성격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기쁨이가 중심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라일리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찾아온다; 정든 고향을 뒤로한 채,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된 것이다.
친한 친구들, 추억의 장소들을 모두 뒤에 두고 낯선 환경에 발을 들이는 것은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이 사건과 함께 그동안 ‘기쁨이’ 위주로 돌아가던 감정들은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다.
많은 부모들이 '좋은 것만 보게 하고, 좋은 것만 듣게 하고 싶다'라고 말한다;
영화 속 기쁨이도 역시, 라일리에게 오로지 '좋은 것'과 '밝은 것'만을 주고 싶어하는 부모와 같다;
자신 외의 감정이 주도권을 잡거나 부정적인 사건이 터지면, 상황을 다시 긍정적으로 돌리려 끊임없이 노력한다.
반면 슬픔이는 기쁨이와 정반대의 감정이다; 적극적이기보다는 소심하고, 밝은 면보다는 어두운 면을 바라보며 기분을 가라앉게 만든다. - 기쁨이는 이런 슬픔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은근히 소외시키려 한다.
하지만 인생은 한쪽 면의 감정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법 - ‘이사’와 ‘전학’이라는 큰 시련 앞에서 슬픔이는 통제할 수 없이 폭주하고, 기쁨이가 부정적 감정을 억누르려는 노력은 오히려 부작용을 낳는다.
(영어로도 toxic positivity 라는 용어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뤄보겠다...!!)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기쁨이는 비로소 슬픔이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슬픔은 타인의 고통을 포착해 공감과 위로를 건네는 동력이 되며, 힘든 순간에도 서로 연대할 수 있는 고리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의 끝에서, 가출 후 돌아온 라일리가 슬픔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짜증이나 억지 웃음과 같은 가면 대신, 눈물을 흘리며 진솔한 감정을 표출하는 순간, 부모님은 그녀를 감싸 안으며 진심으로 위로해 준다.
기쁨은 때때로 ‘이기적인’ 감정이 될 수 있다. 물론 모두가 기쁜 일을 맞이할 때는 문제가 없지만, 각자 다른 문제를 다른 시간대에서 겪는 현실 속에서 내 기쁨에만 취해 있다면 타인의 고통이나 세상의 문제들을 간과할 위험이 있다.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시 하나가 있다 - 바로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기쁨에게'라는 작품이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 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떄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는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슬픔이 단순히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며 공감하는 삶의 중요한 요소임을, 이 시는 아름답고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한때 나는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스토이시즘(stoicism)’을 동경했다 - 기쁨, 슬픔, 분노에 동요되지 않고 모든 것을 초월한 채 살아가는 모습이 멋져 보였기 때문이다.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내 성격에 대해 약간 억울함을 느끼며, “스토익(stoic)한 사람처럼 감정 기복이 작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게 아니라면, 기쁨, 행복, 만족과 같이 긍정적인 감정만 느낀다면 정말 좋을 텐데…”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좀 더 무던하게 태어날 수도 있었는데, 하필이면 감정이 양극단으로 풍부하게 움직이는 성격을 갖게 된 것이 괴로웠다.
그런데 지금은 안다 - 크고 작은 감정에는 모두 저마다의 선기능이 있음을;
기쁨은 좋은 것을 향해 움직일 수 있는 연료가 되며,
슬픔은 나 자신과 타인의 아픔을 포착할 수 있는 센서가 된다.
분노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이 되어주고,
공포는 위협을 알아차려 제때 대응할 수 있게 도와준다.
까칠함(영어로 Disgust인데,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본래의 의미가 흐려진 듯하다)은 바람직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역할을 한다
다만, 이러한 감정들은 온전히 인지하고 수용될 때야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감정을 외면하다 보면 그것들은 마음속에서 곪아 결국 다른 방식으로 표출된다. 라일리가 영화 속에서 슬픔을 억누르다 가출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을 보였던 것처럼.
아쉽게도, 우리는 사회적 존재로서 마주하는 수많은 문제들 앞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에 뚜껑을 덮어 무마하는 일에 그치기 쉽다. (바쁜 일상에 치여 감정을 돌볼 겨를조차 없었던 부모 세대는, 어쩌면 나에게도 그런 방식으로 감정을 전해주었을지 모른다.)
결국, 우리의 인생은 기쁨만으로 채워질 수 없으며, 슬픔과 분노, 공포 같은 감정들도 우리를 성숙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다.
내가 느끼는 모든 스펙트럼의 감정은, 저마다의 가치와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 -그러니, 내게 주어진 수많은 감정을 앞으로 조금씩, 확실하게 마주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고 싶다 - 그 노력이 진정한 성숙함으로 이어지리라 기대하면서.
어릴 적의 동심과 감정들을 훌륭하게 그려낸 '인사이드 아웃'은 오래도록 내 인생 영화로 남아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