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불완전함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얼마 전, 알랭 드 보통의 '불안 (status anxiety)'이라는 책을 읽었다;
책 속 많은 구절들이 나의 내면을 깊이 관통했고,
그때마다 한동안 그 페이지에 잠시 머물며 생각에 잠겼다.
'우리의 '에고'는 바람이 새는 풍선과 같아, 늘 외부의 사랑이라는 헬륨을 집어넣어 주어야 하고, 무시라는 아주 작은 바늘에 취약하기 짝이 없다.'
'우리는 날 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할 운명을 타고났다'
이런 문장들을 보며 문득 떠오른 생각 - "인간이란, 내면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타인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걸까?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확신할 수 없기에, 외부의 평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걸까?"
예민한 성향 때문에 힘들어하는 나에게, '인간은 평생 방황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말은 묘한 위로를 주면서도 씁쓸함을 안겼다.
그렇게 고뇌로 뒤엉킨 마음을 환기시켜 준 것은, 뜻밖에도 '인사이드 아웃 2'라는 애니메이션이었다;
인간은 위태롭게 흔들리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탄탄한 자아를 쌓아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번 글에서는 영화 '인사이드 아웃 2'를 통해, 역경 속에서도
'온전한 나'로 성장하는 법에 대해 얘기해보려 한다.
전작 (인사이드 아웃 1)과 마찬가지로, 인사이드 아웃 2의 주인공 역시 라일리 (Riley)이다;
13살이 되어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그녀는, 성적도 우수하고, 절친과 끈끈한 우정을 유지하며, 하키팀에서도 두각을 발휘하는 '모범생'이다. 그녀의 감정들 (기쁨이, 버럭이, 소심이, 까칠이, 슬픔이)도 그런 라일리를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그녀에게 두 가지 위기가 닥친다;
절친들과 다른 고등학교에 배정된 것에 겹쳐, 사춘기 (puberty)까지 찾아온 것이다.
갑자기 사춘기를 맞이한 라일리의 머릿속에는, 새로운 감정들이 등장한다 -
부럽이 (envy), 따분이 (ennui), 당황이 (embarassent), 그리고 불안이 (anxiety)
특히, '불안이'는 라일리가 새로운 고등학교에서 외톨이가 되지 않도록 전략을 세운다
그 목표는 바로 '고등학교 하키팀에 선발되어, 에이스 같은 존재가 되는 것'.
하지만 불안이는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감정 본부를 장악하게 되며, 기쁨이와 충돌한다.
그리고 지나치게 폭주하는 '불안이' 때문에, 라일리는 점점 위축되며 혼란을 겪는다.
- 이 영화는 사춘기라는 인생의 과도기,
그리고 '불안'이라는 낯선 감정을 마주한 라일리가 진정한 자아를 찾아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소재 중 하나는, 라일리의 자아상 (sense of self)이었다.
초반의 라일리는 스스로 '나는 좋은 사람이야 (I'm a good person)'이라는,
확신에 찬 자아상을 간직하고 있다.
- 곤경에 처한 친구를 돕고, 공부에 성실하며, 만사에 최선을 다하는 스스로의 모습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믿음을 굳혀나간다.
기쁨이(Joy)는 이러한 자아상을 지켜내기 위해, 좋은 기억들(칭찬을 듣거나, 성과를 거둔 기억들)은 라일리의 의식 속에 고이 저장하지만, 반대로 사소한 실수, 반칙, 친구 관계에서의 어려움 등, 자아상에 흠집을 낼만한 '부정적' 기억들은 무의식의 저편으로 밀어낸다;
we keep the best, and toss the rest! (최고의 기억만 두고, 나머지 기억은 보내는 거야!!)
하지만, '불안이'의 등장과 함께, 이 균형이 깨지고 만다 - '불안'이라는 감정에 장악된 라일리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릴 뿐만 아니라,
목표 ('하키팀에서 최고가 되는 것')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나는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I'm not good enough)
여태까지 자신의 밝은 면만을 바라보고,
어두운 면은 외면했던 그녀에게,
자신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감당하기에 너무 벅찼던 걸까...
결국 자신을 지나치게 몰아붙인 '불안' 때문에, 라일리는 공황 발작 (panic attack)을 겪는다;
이때 라일리를 공황에서 구해준 것은, 다름 아닌, 자신에 대한 수용 (acceptance)이었다;
'라일리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억지로 결정할 수는 없어! (We don't get to choose who Riley is)
기쁨이는 라일리의 어두운 기억들을 마주한 뒤, 라일리의 좋은 모습뿐만 아니라 부족한 면까지도 받아들이기로 한다 - 때로는 욕심이 앞서고, 규칙을 어기기도 하며, 과도한 승부욕을 보일 때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이 라일리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공황에 빠져 있는 라일리는 차츰 안정을 되찾는다;
그녀는 자신의 '못난' 면들을 직시함으로써, 스스로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던 것 아닐까. - 이 과정을 거쳤기에, 라일리는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게 된다.
라일리가 그렇듯,
모든 인간은 다면적인 존재이다;
앞서 언급한 '불안(Status anxiety)'이라는 책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등장한다;
현실에서 우리는 '나'에 대하여 아주 다양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
내가 똑똑하다는 증거도 댈 수 있고, 바보라는 증거도 될 수 있으며.
익살맞다는 증거도 댈 수 있고 따분하다는 증거도 댈 수 있으며,
중요한 인물이라는 증거도 댈 수 있고, 있으나 마나 한 존재라는 증거도 댈 수 있다;
심리학의 대가, 카를 융 (Carl Jung) 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어 하는 어두운 면을 '그림자(shadow)'라고 불렀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림자'를 무의식 속에 억누르려 하지만, 이는 회피하면 할수록 더 큰 고통을 야기한다.
- 이를테면, 영화 속 라일리는, 스스로의 이기심과 욕심을 부끄러워하고 부정했다; 그러나, 정작 게임 중 반칙을 저지르거나, 욕심이 앞서는 상황이 닥칠 때마다 자신을 가혹하게 몰아세우게 된다.
- 그러나 영화의 결말에서, 라일리는 그림자를 억누르는 대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법을 터득하면서
한 층 성장한다;
융은 이렇게 긍정적인 면, 부정적인 면을 모두 끌어안는 과정을 '통합 (integration)'이라 명명하고, 이를 진정한 자아에 도달하기 위한 필수 관문으로 여겼다 - 음양(yin and yang)이 공존해야 완전체가 되듯이, 인간도 내면의 빛과 그림자가 조화를 이루어야 온전한(whole) 자신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욕심, 질투, 공격성 등...
이런 감정들은 우리가 감추고 싶어 하는 '그림자'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밝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비춰지고 싶고,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싶기에, 본능적으로 이러한 면을 억누르게 된다. 하지만, 그림자를 외면할수록, 그것은 무의식에 더욱 깊이 자리 잡아 우리를 옥죄고 만다;
여기서, 영화 속 기쁨이(joy)의 대사가 떠오른다;
'어쩌면 나는 불안이를 멈출 수 없는지도 몰라.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건가 봐 - 기쁨을 점점 덜 느끼는 것.'
(Maybe we can't. Maybe this is what happens when you grow up- to feel less joy.)
라일리는 어른이 되어가면서 더 많은 도전과 상처를 경험할 것이다 -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영화 속 라일리의 모습이 유독 우리에게 와닿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여전히 성장통을 겪고 있기 때문 아닐까?
삶은 끊임없는 시행착오의 연속이다 -
수없이 부딪히고, 실수하고, 실패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어두운 면과 마주하게 된다.
그때마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나의 그림자를 부정하며 자책에 빠질 것인가,
아니면 나의 부족함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성장의 발판으로 삼을 것인가?
진정한 성숙함이란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
불완전한 나조차도 온전히 껴안는 것이다.
- 이 영화는, 이 당연하면서도 망각하기 쉬운 교훈을 유쾌하면서도 강렬한 방식으로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