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이것저것 읽다보니 취향이 확고해지고 문학을 정의하는 나만의 관점과 그에 따른 취향이 생겨서 애송이 주제에 용기를 내어 풀어보고자 한다.
모든 문학은 우화성과 자전성을 각기 다른 비율로 내포하고 있다. 우화성이 짙을수록 서사가 목적, 예컨대 메시지 전달을 위한 수단으로써 사용된다. 반면 자전성이 짙을수록 이야기 그 자체가 메시지이자 목적이 된다. 물론 작가의 사고가 펼쳐지는 글의 특성상 우화성과 자전성 어느 한쪽만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1984』가 스탈린의 공산주의 정권을 비판하기 위해 집필되었지만, 자유와 개성의 말살을 경계하는 조지 오웰의 가치관을 슬쩍 보여주듯이 말이다. 반대로 다자이 오사무가 본인의 인생관을 이리저리 풀어내는 『인간실격』은 가상의 인물의 입을 빌려 진행되기에 어쨌든 우화성을 띨 수밖에 없다. 궁극적으로, 문학이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질문에 대한 작은 대답들이니 모든 문학이 우화성을 갖는다고 할 수도 있겠다.
여하튼, 나는 우화성이 옅고 자전성이 짙은 책을 압도적으로 선호한다. 후술하겠지만 자전성이 짙은 일문학을 먼저 읽었어서 그런가, 처음 우화성이 짙은 죄와 벌을 읽을 때 이게 뭐야 싶었다. 이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왜 이런 장면을 삽입했는지 그 의도가 너무나도 뻔히 보였다.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라는 게 있는 것, 그리고 그 메시지가 쉽게 한 문장으로 압축된다는 사실이 책이 아닌 논문답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그 우화에서 파생되는 심리묘사는 내가 본 그 어떤 것보다도 훌륭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정말 남모르게 살인을 저지르고 고뇌한 적이 있나 진지하게 의심할 정도였다. 그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었지만, 내가 진정 원했던 것은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인간의 행동원리와 인생관을 1열에서 감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비겁하게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완벽하게 창조된 그의 피조물을 내세워 그의 내면의 편린을 슬쩍 보여주는 데 그쳤다. 스시를 주문했는데 스테이크가 나왔다. 근데 스테이크가 소름끼치게 맛있어서 불평하기는 또 민망한 그런 상황을 상상하면 될 듯하다.
반면, 자전성이 짙은 책을 집필하는 작가는 그저 이야기를 꺼내놓음으로써 그의 사명을 완수한다. 누구나 자기표현의 욕구를 갖고 있고, 자기표현의 욕구는 창작의 욕구로 이어진다. 소설을 집필하는 것은, 깊이있는 사람의 세계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창작방법이다. 표현의 종류와 범위에 한계가 없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렇게 잘 그려진 사람들의 사상과 신념을 구경하는 걸 엄청나게 좋아한다. 따라서 자전적 기조가 강한 일문학은 특히 나와 잘 맞는다. 본인의 주장을 펼치는 것이 터부시되는 문화권이라 그런가, 책들이 확실한 메시지나 비판을 던지기보다는 은은하게 작가의 삶을 노래하기 때문이다. 물론 일관되게 본인에 대한 소설을 쓰기에 자기복제가 판치지만, (하루키만 봐도 항상 먹던 그 맛이다) 소세키나 오사무같이 정말 뛰어난 괴물같은 소설가들은 그런 기색조차 없다. 그 사람들은 분명 같은 사람인 본인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 명확하게 다른 여러 명의 이야기처럼 풀어내는데, 그 솜씨가 가히 기이할 정도다.
물론 책을 몇 권 읽지도 않은 애송이가 '나는 일문학이 제일 좋아요'라는 의견을 피력하다니 정저지와 그 자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강박이 아니고 취향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하고 얼버무리는 중이다.
일문학 중에서도 하루키의 책은 내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하루키의 문학성이 최고라는 사실은 절대 아니다. 그의 책들보다 더 잘 쓰인 책들이 머저리인 내 눈에도 잔뜩 보인다. 단지 내가 독서라는 취미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읽은 책들은 내게 특히나 많은 영향을 끼쳤고, 그중 가장 처음 읽은 『상실의 시대』는 내 안에 인간관계라는 것에 대한 고찰을 촉발시켰다. 인간관계라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복잡미묘하고 예민하고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그때서야 알았다. 그것조차 몰랐다면 나는 스스로가 고립되어 말살되어가는 것도 모른 채 스스로를 더욱 스스로 안에 파묻어 끝끝내 숨이 막혀버린 채 메말랐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상실의 시대』는 약간 과장을 섞어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겠다.
하루키의 책은 어느 것이든 언제나 나를 몰입시킨다. 책 안에 내가 응축돼 담겨있는 듯한 느낌 때문이다. 내가 갈망하는 것도, 두려워하는 것도, 소유하는 것도 담고 있다. 나보다 현명한 조언자, 새로운 미지로의 여행, 그리고 단순하지만 집요한 문체. 모두 내가 갈망하는 것들이다. 나는 새로운 곳과, 그림이 됐든 소리가 됐든 내 사고의 틀을 벗어나는 자극이 좋다. 하루키가 펼치는 서사는 그런 의미에서 언제나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문체야 뭐,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루키스러워져서 별로 할 말이 없다. 신뢰의 상실과 버려짐은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루키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그런 곤경에 처한다. 마지막으로 어김없이 등장하는 그 메말랐으면서도 고요한 분위기, 침착하고 공허한 주인공은 나와 잘 공명한다. 취향에 맞고 공감이 된다.
하지만 사실 제일 중요한 건 하루키만의 이세계다. 그가 서술하는 그 형용할 수 없는 몽환의 세계는 마음에 든다. 애초에 머리에 그려지지 않는, 글로써만 표현되는 동그란 네모같은 세계다. 상실이 시대를 처음 읽고 다른 "하루키다운" 책을 읽었을 때는 이게 뭔가 싶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그 세계를 덩달아 추억하게 된다. 그 세계는 심상이다. 하루키의 눈으로 들여다본 인간의 내면, 아니 본인의 내면이다. 나는 그 세계에 공감할 수 있다. 그 사람이 내면을 관조하는 방식과, 내가 내면을 관조하는 방식이 동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관찰력은 나보다 훨씬 뛰어나고, 내면은 더욱 성숙하고 체계적이다. 예를 들어, 나는 하루키를 읽을 때의 갈대빛 땅과 회색 하늘이라는 심상을 느낀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잘 모르겠다. 『상실의 시대』를 읽을 때부터 그런 풍경이 떠오르고, 다른 하루키 책을 읽을 때도 항상 보인다. 다자이 오사무의 책을 읽을 때는 도쿄의 골목과 더러운 비냄새가 난다. 바흐를 들을 때는 자연스럽게 거대하고 정갈한 나무 책꽂이가 보인다. 그냥 그렇게 된다. 단지 하루키는 같은 심상을 묘사하는 데 나처럼 네 단어가 아니라 네 문단을 할애하는 것뿐이다. 더 크고, 자세하고, 복잡한 게 보이니까! 나도 언젠가 심상을 보는 눈을 갈고닦아서 그 정도의 눈을 갖추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