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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Nov 01. 2021

베이징 여행(01)

잿빛 추억 컬러링(14)


북경 삼박사일

1998년 삼국지관련 전시회가 열려 삼국지와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아이들과 함께 [어린이대공원]을 찾았다. 특별기획전에 전시된 그림과 소품들을 보면서 중학시절 삼국지를 읽었던 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당시 6학년이던 큰아들은 연재만화를 통해 삼국지 내용을 꾀 차고 있었기에 전시회 기획사에서 주관했던 삼국지 그림그리기 대회에 참가해 초등부 금상을 받고 부상(副賞)으로 북경 행(行) 왕복 항공티켓을 받았다. 이를 핑계로 이듬해 8월 휴가를 내어 함께 가족여행을 떠났다.  


9시 30분 김포공항을 출발해 2시간을 날아가 첫날 [천안문 광장]으로 향했다. 천안문 광장은 중국을 대표하는 으로 [베이징] 중심에 있다. 이 광장은 동시에 백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드넓은 광장으로 꼽히는 곳이다.


천안문 광장

1215년 징기스칸이 모든 것을 불태우고 난  다시 건설된 베이징은 1271년 몽골제국 제5대 황제인 쿠빌라이 칸(Kublai Khan) 국호를 대원(大元)이라 천명하며 중국 역대왕조의 계보를 잇는 정통 왕조임을 내외에 선언한 뒤 수도로 정해졌다.


1368년 주원장이 베이징을 탈환하며 명왕조가 들어선 이후 17세기 청조(淸朝)를 세운 만주족이 다시 베이징을 차지하면서 대대적으로 확장되었다. 1949년 모택동이 천안문 광장에서 인민공화국을 선언하며 지금의 베이징 모습으로 변모하였다.


천안문

1999년 베이징 도심풍경은 무척 낙후돼 있었다. 간간히 솟아있는 빌딩과 경제개방 후  새롭게 지어진 호텔들 사이로 낡은 건물이 즐비하고 웃옷을 걸치지 않은 남성들이 시내를 활보하며 택시는 운전기사 보호막이 설치돼있을 정도로 치안도 매우 불안했다.


시내거리의 공중화장실에는 문짝이 없이 개방돼 있었고 관광버스로 이동할 때마다 장사꾼들이 몰려들어 버스 창을 통해 접이부채 100개 또는 터보라이터 10개 등을 한화 1만원에 팔고 있었고 숙소호텔 로비에서도 1만에 자만옥 도장을 새겨주고 있었다.


 천안문 광장


북경시내 한가운데 위치한 [천안문 광장]은 모택동의 대형 초상화와 펄럭이는 오성홍기(五星紅旗)로 북경을 상징하는 중국 최대의 명소이다. 광장의 북쪽에 위치한 천안문(天安門)은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약34m 높이로 웅장해 보인다.


천안문에 걸려있는 [마오쩌둥 초상화]와 붉은색 깃발 및 코랄 빛 웅장한 성벽은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중앙 대문으로 향하는 흰 대리석위에 새겨진 조각들은 하늘의 평화와 황제의 권력을 상징하는 듯 보인다.



[천안문 광장]은 천안문 사태로 중국 민주화 상징이 되어 더욱 유명해졌다. 1989년 6월 민주화를 요구하며 광장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학생과 시민들을 둥소평 정부군이 탱크로 강제 진압시키며 수많은 사상자를 낸 후 유혈사태를 마무리했다.  


광장주변에는 여러 개의 인상 깊은 건축물들이 주변에 들어서 있는데, 광장을 중심으로 ①북쪽은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천안문이며 ②동쪽은 국가박물관 ③서쪽은 인민대회당 ④남쪽에는 모택동 기념당이 있다.



[천안문 광장]은 경축행사와 군중행렬 등이 이뤄지고 있으며 해 뜨는 시각에는 군인들이 도열해 중국 오성홍기를 게양한다. 광장중심에는 인민영웅기념비가 서 있고 아침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체조와 태극권 등을 즐긴다고 한다.


 인민영웅기념비

[천안문 광장] 남쪽 중앙에 우뚝 서있는 이 기념비는 38m 높이로 인민중화민국 수립을 위해 희생된 사람을 추모하기 위해 1958년 세워졌다. 정면에는 마오쩌둥이 쓴 “인민의 영웅은 영원히 멸하지 않는다(人民英雄垂不朽)”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주은래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인민대회당

[천안문 광장] 서쪽에 있는 인민대회당은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에 해당되는 곳이다. 건축면적 52,000평의 대규모 건물로 14,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5,0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대연회장은 중국을 방문하는 국가원수의 환영연을 열어주는 곳이라 한다.



모택동 기념관

마오쩌둥 기념당은 모주석이 서거한 1976년에 시작해 이듬해 완공됐는데, 기념당에는 2종류의 푸른 소나무가 심어져 있다. 이중에서 13그루의 푸르른 청송은 혁명성지로 불리는 연안(延安)에서 옮겨 심은 것이라 한다.



  자금성(紫禁城)


아름다운 첩과 호색한인 황제 그리고 과시적인 부에 관한 옛 세상의 숨결이 여전히 무성한 [자금성]에는 정원, 안뜰, 정자, 왕궁의 거대한 궁전에 남아있다. 대부분의 건물이 18세기 후반의 것이며 20세기 외세의 침략과 약탈로 손상된 곳이 일부 남아있다.


명나라에서 청나라까지 560년에 걸쳐 24명의 황제가 살았던 대제국의 황궁 [자금성]은 주황금색 지붕의 웅장한 중국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1407년 명나라 영락제(永樂帝)가 난징[南京]에서 베이징으로 천도하기 시작할 때부터 건립해 1420년에 완성됐다.


자금성 황금빛 지붕

자금(紫禁)이란 북두성 북쪽에 위치한 자금성이 천자(天子)가 거처하는 곳이라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천자의 궁전은 “천제(天帝)가 사는 자궁(紫宮)과 같은 금지구역”이라는 뜻에서 연유되었다.


태화전

영화 마지막 황제(1988년)에서 어린 푸이가 황제 즉위식을 올린 태화전을 비롯해 왕위를 사이에 둔 갈등과 정권다툼, 정변 등 온갖 비화와 음모가 숨어있는 자금성은 비밀스럽고 신비한 공간이었다.



황제를 보호하기 위한 자금성은 외적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50미터 폭으로 된 해자(垓字)를 설치하였고 높이 10미터 성벽으로 둘러 쌓여있는 모습이다. 중국의 황제는 유일한 신의 존재이지만 동시에 가장 약하고 고독한 존재이기도 했다.



이들은 암살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금성의 높은 담장 안에서 가까운 가족이나 신하까지도 믿지 못하고 평생 두려워하며 살았다. 특이하게도 자금성 안에는 나무가 없다. 이는 황제를 시해하려는 자객이 숨을 곳을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마저 불안해 지하로 땅을 파고 들어오는 자들을 막기 위해 바닥에 40장 두께의 벽돌을 깔아서 나무를 심어도 자랄 수가 없었다. [천안문]을 들어서면 성내(城內) 중심이 남북 간 2구역으로 크게 나누어져 있다.



남쪽구역은 공적 장소로 오문(午門)에서 부터 북쪽으로 태화문 ⇨ 태화전 ⇨ 중화전 ⇨ 보화전이 한 줄로 늘어서 있다. 중국에서는 옛날에 북(北)을 자(子), 남(南)을 오(午)라 하여 오문은 [자금성] 중심축 남쪽에 위치해 붙여진 명칭이다.


오문(午門)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은 자금성의 다른 문들과 다르게 양쪽에 날개가 있고 5개의  문이 있다. 3개의 문은 정면에 나있고 나머지 2개의 문은 정면과 날개사이에 뚫려있다. 정면 3개중 가운데 높은 출입문은 황제만이 출입하고 좌우측은 대신들이 출입했다.



오문을 통과하면 금수교(金水橋)와 태화문이 나온다. 남쪽구역 태화전(太和殿)은 [자금성]의 정전(正殿)으로 중요한 의전장소 사용됐다. [태화전]의 삼단 기단(基壇)은 하늘의 아들인 황제가 머무는 건물에 만 사용되었다.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은 황제가 태화전에서 공식업무를 보다가 피곤하면 잠시 쉬는 공간이며 우측에 있는 직사각형 형태의 건물은 보화전(保和殿)으로 과거시험을 보던 장소였다고 한다. [중화전]과 [보화전]에는 황제가 앉던 옥좌가 남아있다.


중화전(中和殿)
황제 옥좌

남쪽구역 보화전을 지나면 북쪽으로 들어가는 건청문이 나타난다. 북쪽구역은 황제의 개인적인 즉 사생활을 위한 내정(內廷)으로 건청문을 지나면 건청궁 ⇨ 교태전 ⇨ 곤녕궁이 늘어서 있다. 건청궁의 서북쪽에는 별도의 2개 전각(殿閣)이 있다.


보화전(保和殿)

건청궁(乾淸宮)은 명대(明代) 황제의 침실로 사용되었다. 이 궁에는 황제 침실만 8개가 있어 내시도 황제가 어느 방에서 잠을 자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교태전(交泰殿)은 명나라 초 황후(皇后)가 머무르며 생일 때 축하의 예를 받는 장소였다


건청궁(乾淸宮)
교태전(交泰殿)

교태전은 청(淸)의 건륭황제 이후 옥쇄를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됐고, 뒤편 2층 지붕인 곤녕궁(坤寧宮)은 제5대 옹정제(雍正帝) 때 궁의 공간을 2개로 나눠 [동난각]에는 황제와 황후의 침실로 잡았고 그 이후에는 주로 황후가 머물렀다.


곤녕궁(坤寧宮)

어화원(御花園)은 우리나라 창경궁 후원같이 황제가 쉬면서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자금성]에서 유일하게 자연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의 어경정(御景亭)이라는 정자는 황제가 주변경치를 즐길 수 있도록 인공적으로 쌓아올린 바위 퇴수산(堆秀山) 위에 높게 배치했다.


어경정(御景亭)

성내(城內)를 둘러보며 북쪽 후문인 신무문(神武門)을 통해 자금성을 빠져나왔다. 고대 금단의 성을 걸어보며 화려했던 옛 중국의 역사를 느껴보는데 최소 2시간 이상이 소요되고 꼼꼼히 살펴가며 관람하기 위해서는 하루가 걸릴 만큼 넓은 곳이었다.   


신무문(神武門)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황실만의 공간이었던 자금성은 1987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세계 100대 문화유산으로 남게 됐으며, 현재 황실의 찬란한 전통과 유적을 간직한 박물관으로 바뀌어 세계 관광객들의 발길을 사로잡고 있다.



  중국전통 서커스 관람 


저녁식사를 마친 뒤 찾은 북경 3대 기예(技藝) 쇼는 중국전통의 ①소림무예와 ②변검술(變瞼術) 그리고 세계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③서커스인데 이러한 기예는 신기한 곡예와 다양한 기술 및 예술이 집대성된 중국 고유전통 예능이라 한다.


특히 연극기법의 하나인 변검술은 무척 어려워 오랜 연습과 많은 노력이 필요해 전수자가 많지 않다고 한다. 중국 서커스는 소극장에서 자전거 곡예부터 공중줄타기, 막대기 곡예 외에 여러 동물들과 함께 하는 쇼와 다양한 볼거리로 이뤄져 있다.


자전거 곡예

이곳의 예술 공연 단원들은 3세 때부터 서커스를 배우며 스무 살이 되면 퇴출된다고 한다. 곡예사들의 뼈 모양이 일반인과 확연히 달라 50세 이상을 살지 못할 정도라는데, 환상적인 쇼와 깜짝 놀랄 공연을 보는 내내 박수와 감탄사를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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