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수로를 까라구요?
군인에게 요구되는 능력
드디어 꿈에 그리던 소위 계급장을 어깨에 달고
국가를 수호하겠다는 책임감을 가슴에 품고, 그 책임감을 다 하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가지고 야전의 한 부대에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수많은 신고 과정을 거치고, 드디어 첫 중대장에게 부여받은 임무는 소대원 10명을 데리고 '배수로를 까고 와라'였다.
'배수로를 까라고?' 일단 '알겠습니다'라고 용기 있게 대답하고는 작업장소로 출발했다.
작업장소인 길게 펼쳐진 전술도로에서 소대원들과 작업을 하면서 '배수로'가 무엇이고, '배수로를 깐다는 것이 무슨 뜻이며', '배수로를 왜 까라는 건지' 알게 되었다.
내가 여태 배운 것은 어떻게 전투를 구상하고, 어떻게 지휘하며, 부대관리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배웠고 그 분야에서 좋은 성적도 받았기에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생뚱맞은 첫 임무에 교육기관에서 혹시 삽질하는 법과 배수로 까는 수업에 내가 결석을 했었나라는 의심이 드는 순간이었다.
군인에게 요구되는 능력을 얘기해 보라고 하면 군인은 소총을 들고 산을 숨도 헐떡거리지 않고 뛰어다니고 무거운 것도 척척 드는 이미지를 대부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체력'과 '전투기술'을 대표적으로 떠올릴 것이다.
물론 두 가지 능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갖춰야 할 능력이 맞지만 군인에게는 그들의 생각보다 수많은 다양한 능력이 요구된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소위, 중위 계급에는 무엇보다 '체력과 전투기술'이 요구된다. 이 계급은 대부분 명령을 필드에서 이행하는 필드 플레이어(Field player)이기 때문에 강인한 체력은 필수이고, 체력을 바탕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전투기술이 필요하다. 또한 약 30명 남짓의 부하들을 유기적으로 조직하고 운영할 수 있는 약간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또한, 일부 인원들은 참모업무를 수행하게 되는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나 또한 참모업무를 하면서 군인은 참 다양한 능력이 요구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부대 예정사항을 만들어 과장님께 보고하는데 그때서야 그 한 장의 문서가 얼마나 정교한 기술들의 집합체인지 알게 되었다. 성격이 다른 내용의 단어마다 색깔을 구분하는 것이며 내용마다 다르게 적용해야 하는 줄간격 등 한글 프로그램을 한 번도 이용해 보지 않았던 나로서는 그 한장을 만드는데 진땀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여기에더해 보고서를 프레젠테이션으로 전환하는 것은 또 다른 능력이 필요했고 나는 내 후배들에게 반드시 문서 프로그램의 활용 능력과 그것을 아름답게 꾸밀 수 있는 미적감각을 배워 임관하기를 추천하리라 다짐했었다.
대위부터는 약 100명 남짓의 중대원들과 함께 임무 수행을 하게 된다. 지금에서야 드는 생각이지만 100명이라고 하면 웬만한 중소기업 직원 숫자와 맞먹는데 그 인원들을 하나하나 관리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다. 어쨌든 중대원 100명이 우르르 몰려가 임무수행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소대장들에 의해 분산되어 각각의 임무를 수행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때는 부대 임무를 사전에 예측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가장 크게 요구된다. 또한 대위로 임무수행하는 약 7년의 기간 동안 대부분 참모업무를 하게 되는데 이때부터는 내가 쓰는 단어 하나에 예하부대 수만 명이 움직이기 때문에 보고서 한 장 한 장에 기울이는 노력은 중위 때보다 수십 배에 달했다. 그렇기 때문에 상급부대와 연계한 예측력과 판단력, 그리고 보고서를 예쁘게 만드는 예술적 감각과 리더십, 보고서에 들어갈 알맞은 단어를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는 문장력까지.. 수많은 능력이 요구되고,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고도의 회복탄력성까지 요구된다.
영관장교부터는 더 다양한 직책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지휘관에서부터 참모, 교육기관의 교관 등 그 역할의 범위가 참으로 다양하다. 앞서 언급했던 능력에 더해 기획력, 그리고 과장급 실무자 이상을 하기 때문에 스피치 능력, 어학능력 등이 추가로 필요하게 된다.
그동안에 내가 경험한 계급들을 생각해 보면서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던 능력들을 나열해 보니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갑자기 이 내용이 떠오른 건 아들과 함께 직업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군인은 무엇을 잘하는지 물어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무엇이 필요한지 몰라서라기보다는 너무도 많은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내가 경험을 통해 필요하다고 생각한 능력들을 모두 갖추면서 생활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노력해 나가는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앞으로는 어떠한 능력과 감각들을 요구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