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밥상
시어머니께서 나를 보자마자 맨발로 뛰쳐나오셨다. 오랜만에 본 며느리를 딸보다도 더 반갑게 안아주셨다.
암수술 후 항암치료까지 받고 나니 일 년이 훌쩍 흘러 있었다. 그 사이에 시댁을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시어머니는 어제 만난 것 마냥 정겹게 맞아주셨다.
"야야! 의사 선생님한테 약 좋은 거로 해주라고 했제. 암 죽이는 주사 맞아서 다 없앴제?"
언제나 구수한 시골할머니 말투로 말씀하셨다. 시어머니는 따스한 마음을 알면서도 나는 괜히 엉덩이를 쭉 빼며 어색하게 안겼다. 지금도 이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 죄송스러운 마음이다. 사실 멀게만 느껴졌던 시어머니께서 나를 힘껏 안아주셨을 때 기분이 이상했다. 친정엄마께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따뜻함 때문에 어색했던 것 같다. 친정엄마께서는 본인 삶이 더 중요하셨기에, 자식에 대한 마음이 살갑지 않으셨다. 그랬기에 한 번도 나를 따뜻하게 안아준 적이 없으셨다. 그리고 내가 더욱 슬펐던 것은 암이라고 말했던 날이었다. 나를 걱정해 주실 줄 알았는데 엄마의 친구분 이야기를 하시며 옛날에 수술 잘 받아서 아직도 잘 살고 있다며, 너도 괜찮을 거라는 식으로 다른 사람 대하듯 가볍게 말씀하셨다.
‘나를 말없이 안아주셨더라면 아니면 손이라도 잡아주셨더라면 이렇게 마음 아프지 않았을 텐데.'
그날의 기억은 오래도록 상처로 남았다.
시어머니께서는 오래전 결혼도 안 한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으셨다. 그리고 삼 년 전 큰 딸을 유방암으로 잃으셨다. 자식을 한 명도 아닌 둘씩이나 하늘나라로 보냈다. 그랬기 때문에 암선고를 받았을 때 말씀드리고 싶지 않았다. 아니, 말할 수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하겠다. 주위 사람들은 시어머니가 팔자가 세서 자식을 둘이나 앞세웠다고 떠들어댔다. 수술날짜를 받고도 말하지 못했지만 결국 주말아침에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오늘 점심 먹으러 집으로 갈게요."
"애들이랑 다 같이 올끼가?"
"아뇨. 우리만 갈게요."
어머니는 우리만 간다는 말에 이상함을 느끼신 듯했다. 시댁에 도착하자마자 무슨 일이라도 있냐며 물으셨다. 어머니와 정면으로 마주한 나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드렸다. 시어머니께서는 믿어지지 않으셨는지 잠시 말씀이 없으셨지만 나중엔 내 손을 꼭 잡아주셨다. 큰 딸도 유방암으로 그렇게 떠나보냈는 데 며느리인 너는 꼭 이겨내라고 하셨다.
나는 그 후 씩씩하게 항암을 잘 견뎌냈고 방사선 치료도 잘 받았다. 더 이상 우리 어머니가 팔자 세다는 말을 듣게 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잘 버텨냈다. 시어머니는 내가 잘 먹는지 아프지 않은지 늘 신경 쓰셨다.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어머니께서
“네가 좋아하는 거 많이 했으니깐 마이 묵어야 한데. “
강된장에 김치전, 각종 나물까지 한상 가득 내오셨다. 나는 먹을 때마다 가슴에 가시가 박힌 듯 따가웠다. 친정엄마는 투병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반찬을 해주신 적이 없으셨기 때문이다. 비교하기 싫었지만 나의 마음은 이미 시어머니로 기울어져 버렸다. 몸이 아픈 것은 병원에서 치료받지만 마음 아픈 것은 사람을 통해 치유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 큰 일을 겪고 보니 나에게 신경 써 주는 사람이 제일 좋은 사람이었다. 시어머니는 불편하고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는 데 가까워져도 좋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시어머니께서 해주시는 음식을 먹을 때 가시 박힌 듯 따갑지 않고 달콤함이 느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