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지 않은 경험치 획득
몇 번째 이별인지 언젠가부터 기억나지 않는다. 이별할 때마다 하등 쓸모없는 ‘이별 횟수’는 왜 세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참을 꺼이꺼이 울다 보면 어김없이 처음인 냥 내게 묻는다. ”대체 이게 몇 번째야? “ 눈물이 잔뜩 섞인 콧물을 대충 닦아내고선 X들과의 이별을 휘리릭 세어본다. 누구 다음에 누구, 그다음엔 누구.. 이번 이별과 전혀 관계없는 X들은 다시 소환되고 덕분에 한층 더 처량해진 나는 본격적 신세한탄과 함께 꺽꺽거리며 울기 시작한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 보면 헤어짐이 슬퍼서 우는 건지 자기 연민 때문에 우는 건지 모를 지경이 된다. 그 지경이 첫 번째 이별 때는 1년, 다음 이별 때는 6개월, 그다음 이별 때는 3개월, 그다음 이별 때는 한 달, 그다음 이별 때는 일주일, 이런 식으로 줄어간다. 이 공식대로라면 이번에 나는 3일을 넘기지 않으리. 이 말인즉슨 출근 전 화장을 할 때 거울 속에 비치는 퉁퉁 부어 시뻘게진 눈을 3일만 보면 된다는 말이다.
몇 번의 이별을 경험하면서 알게 된 확실한 하나는 제 아무리 애틋했던 기억도, 죽을 것만 같던 슬픔도 시간 앞에서 무뎌져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이별 첫날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고 매번 새롭게 끔찍하다. 게임의 끝판왕 같다고나 할까.. 수회 반복되어도 이별 첫날만큼은 그 위력을 여과 없이 과시한다. 그렇기에 그날에 나는 속수무책이다. ‘이별 첫날’은 그 자체만으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여 온갖 불안과 슬픔들로 내 심장을 실컷 헤집어놓고 결국은 나를 초단위로 부서뜨린다. 이별 첫날만이 가진 반갑지 않은 힘이다.
갑작스러운 이별을 한 어느 날이었다. 친한 지인이었던 J를 만나기로 하여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던 중 X에게서 헤어짐을 통보받았다. 이윽고 만나게 된 J는 내 눈에서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읽었는지, ‘언니를 오늘 이대로 집에 보내지 못할 것 같아요. 우리 집에서 같이 자요.’라며 부모님이 계신 집에 나를 끌고 가다시피 했고, 자신의 침대를 선뜻 내어주었으며, 잘 곳을 잃은 그녀는 그녀 방 방바닥에 누워 나의 초라했던 이별 첫날을 함께 견뎌주었다.
갑작스러운 이별은 또 찾아왔다. 정말이지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힘들다는 말이 상투적 표현이 아닌 물리적으로 나타나는 신체현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 날이었다. 숨이 넘어갈 것만 같은 내 목소리를 들은 친구는 모유수유 중임에도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곤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던, 그래서 실제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자신의 내밀한 비밀 같은 이야기를 힘겹게 털어놓았다. 그녀의 얘기를 듣는 동안만큼은 바로 뒷 이야기가 어찌 되는지 궁금하여 내 이별이 잠시 잠시 잊히기도 했다. 그녀는 이런 고통이 가져올 축복에 대해서도 충분히 얘기해 주며 날 위로하였고 우린 그렇게 나란히 앉아 무심한 밤바다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검은 파도가 우리 앞으로 철썩이며 밀려올 때마다 바다 그 멀고 깊은 곳으로 우리의 아픔을 영영 가져가주길 바랐던 잊지 못할 밤을 기억한다.
그런 따뜻한 챙김과 사려 깊은 배려들로 이별 첫날에 무너져 내렸던 나를 조금이나마 다시 일으켜 다가올 시간들 앞에 날 세워둘 수 있었다.
오늘도 이별했다. 하필 오늘이 토요일이라 이틀 동안 이별지옥이 날 삼켜버릴까 봐 급히 부산행 기차표를 끊어 이제는 자녀가 3명이나 되어버린 친구네 집으로 피난 가고 있다. 그 친구에게 문자가 온다. “얼른 와, 데리러 갈게. 부산역 말고 울산역에서 내려.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