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로 일기를 쓸 때였다. 정자체로 꾹꾹 힘주어 쓴 첫 줄은 정갈했다. 처음엔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쓴다. 그런데 한결같이 연필에 모터가 달린 것도 아닌데 심이 지나가는 속도가 빨라지곤 했다. 셋째 줄이나 넷째 줄을 쓸 때면 어김없이 글자가 틀리거나 글씨가 흐트러지거나 띄어쓰기 간격이 벌어지곤 했다. 나는 그것이 아주 거슬렸다.
지우개로 벅벅 지웠다. 힘주어 지우고 지운 곳을 또 지웠다. 매끈했던 종이는 보풀이 생긴 것처럼 오돌토돌해졌고, 잘못 쓴 글은 자국으로 남았다. 그 흔적이 남는 것이, 그 위에 아무리 새로 잘 써도 썼던 자국이 남는 것이 싫었다. 내 눈에는 그 종이에 패인 그 자국이 너무도 선명하게 보였다.
천천히, 살금살금 종이를 찢었다. 살살, 찢은 티가 나지 않게. 그렇지만 꼭 한두 군데 찢은 흔적이 남았다. 질기게도 공책에 붙은 종이 쪼가리를 노려보다 커터칼로 떼어냈다. 그러고는 처음부터,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썼다.
고등학교에 가서는 스프링 노트를 샀다. 파란색, 빨간색, 초록색 이 세 가지 색깔로 포인트를 정해 필기에 심혈을 기울일 때였다. 위계에 따라 핵심 정리를 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때도 어긋나는 것을 참지 못했다. 수정액이라는 편리한 도구를 쓰면 그 새하얀 면이 잘못 쓴 것을 더 명백하게 드러냈다. 스프링 노트는 찢기에 좋았다. 스프링에 매달린 쪼가리를 떼면 완벽했다. 하지만 노트는 얇아지고 가벼워졌다. 내 노트의 두께를 면밀하게 살필 사람이 없었을 텐데도 나는 얇아진 흔적이 켕겼다.
대학에 들어가서 쓴 컴퓨터는 요물이었다. 얼마든지 되돌릴 수 있었고, 몇 번이고 새 문서를 열 수 있었다. 내가 모르거나 발견하지 못한 티는 있어도, 고친 티는 나지 않았다. 출력한 종이에는 사투한 이력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처음부터 다시 쓰고 싶어도 삶은 그럴 수가 없었다. 태어난 것부터 말이다.
나는 외동딸이 되었다. 몸이 약한 엄마는 내 밑으로 두 번이나 유산했다. 자라면서 형제를 간절히 바란 적은 없었지만 형제가 있었다면 달랐을까 생각한 적은 있다.
“외동딸이어서 부모님 사랑을 독차지하셨겠네요!”
사랑을 독차지하긴 했다. 하지만 고통도 독차지였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부터 엄마는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다. 안면이 칼날처럼 베이는 것 같은 고통이라고 한다. 그때는 병명을 알아내기까지도 오래 걸렸다. 흔치 않은 병이고 완치도 어려웠다. 삼차신경통. 차마 헤아릴 수 없는 고통으로 엄마는 울부짖었다. 그즈음부터 아빠는 바깥으로 돌았다. 싸움이 잦아지고 상흔은 깊어졌다. 엄마는 먹고 있는 약을 한꺼번에 털어 넣는 것으로 표출하곤 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위 세척을 할 테니…….”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위 세척을 하고 나면 살아난다고 했다. 그러면 으레 아빠는 담배를 피러 나갔고, 나는 홀로 남아 숨죽여 울었다. 엄마는 고통을 알리기라도 했지만 나는 그럴 수조차 없었다. 그런 일이 없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 페이지를 몽땅 찢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삶은 찢어지지 않았다.
컴퓨터는 대단했다.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울 수 있었다. 아무도 내가 지운 것을 몰랐다. 그리고 그만큼 나는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못했다. 커서만 제자리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때쯤 나는 무한정 고치기만 해서는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깨달았다.
그렇지만 출판사에 취직한 후로 병이 도졌다. 교정지를 출력해 여백에 윤문한 문장을 썼다. 그러다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더 좋은 단어가 생각날 때면 여지없이 수정액을 써야 했다. 어떤 때는 수정액 범벅이 되기도 했는데, 그러면 그 거슬림병에 못 이겨 해당 페이지만 뽑아 새로 썼다. 이리저리 흔적이 남은 것을 저자에게 보내기 싫었다. 그러니 속도를 내야 할 구간에서도 나는 자주 정지했다. 마감이 코앞이었다.
엄마와 아빠 사이에는 결국 증오만 남았다. 나는 묻고 싶었다.
“나를 왜 낳았어?”
태어나고 싶지 않았는데 태어남을 당했다. 지우고 다시 쓸 수도, 찢고 새로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보호받지 못한 채 웃풍이 몰아치는 방 안에서 잠들고, 슬레이트 지붕이 맞닿는 골목을 지나야 했다.
그럼에도 그 시절엔 묻지 못했다. 나의 물음이 119를 불러올 게 뻔했으므로, 물음을 삼켰다. 또 어렴풋이 알았다. 그런다고 새로 시작할 수 없음을.
“나는 태어나고 싶지 않았어!”
딸아이가 울었다. 아이는 지금 고통 속에 있다. 그 고통의 원인에는 나도 있다. 나는 희망했지만 하지 못한 것을 하게 해 주고 싶었다. 내가 돌아 돌아 돌아서도 가지 못한 길을 아이가 직선으로 갈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다. 그러면서 때로는 실수했고, 때로는 방패막이가 되어 주지 못했다. 그 도로에 가시가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지우개로 지우고 싶었다. 그 어디쯤부터 지워야 할까. 어디서부터 새로 써야 할까. 거슬러 올라가 헤아려 본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일까? 다시 쓴다면 다르게 키웠을까? 안절부절하지 않고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아이가 넘어지고 돌아가더라도 뒤에서 천천히 걸어갈 수 있었을까?
아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필기하며 공부를 갈망했을 때로. 일기를 꾹꾹 눌러 쓰며 작가를 꿈꿨을 때로. 어쩌면 태어나기 전으로.
지우개를 버렸다. 나의 결핍과 모자람을 아무리 지워도 자국이 남았다. 그 자국이 나에게도 아이에게도 남았다. 시간은 새로고침을 할 수 없다. 그저 자국을 끌어안고 나아갈 수밖에. 상흔이 남고 수정액이 범벅이더라도 삶이 두꺼워질 테다.
지우개를 버렸다. 지나간 자국을 보는 것은 아프지만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 말을 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