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맨발의 청춘(1964)>
60년대의 한국영화를 보는 것은 90년대 이후의 한국영화를 보는 것과는 굉장히 색다른 경험으로 남기 마련이다. 우선 노골적인 성우들의 더빙이 끊임없이 감상을 방해한다. 이런 ‘과장된 억양’이 시대의 변화와 맞물린 언어변화로 인한 언어직관의 변화에 의한 것인지, 단순히 당시와 지금의 연기관습의 차이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관객들에게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이 영화’ 임을 알려주며 끊임없이 감상을 방해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후시녹음’에 익숙해진 뒤라고 하더라도 60년대의 한국영화감상은 여러 방면에서 방해를 받기 마련이다.
<맨발의 청춘>의 감상을 방해하는 것도 그런 요소들이다. 가령 영화의 결말 이야기를 해보자. 사회에서 쫓기게 된 주인공 커플은 동반자살로 생애를 마감한다. 비극적인 일이다. 그리고 현장에 주인공의 ‘형님’이 등장한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주인공에게 벌어진 비극에 몸서리친 ‘형님’은 경찰에게 자신의 행적을 자수한다. 세상에. 게다가 그걸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형님의 형님’, 그러니까 깡패 두목은 그 옆에서 자신의 죄가 더 크다며 “감옥에 가야 할 사람은 나야”라 말한다. 세상에. 이렇게 순해 빠진 사람들이 어떻게 험난한 범죄자 업계에서 살아남아 왔단 말인가?
물론 영화의 결말에서 깡패 두목이 실제 깡패 두목 같은 행동을 보였다면, 이 영화는 극장에 걸리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에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서라면 문교부의 검열을 통과했어야 하니 말이다. 때때로 중앙정보부까지 개입했던 당시의 검열은, 이미 원작소설의 대사를 '범죄는 나빠요'류의 대사로 바꾼 바 있던 <오발탄(1961)> 같은 영화에게도 상영금지 처분을 내렸으니 말이다. <오발탄>이야 샌프란시스코 영화제 본선에 올라가며 상영금지 처분이 해제됐지만, <맨발의 청춘>에도 같은 행운이 찾아올 것이라는 상황은 예측할 수 없으니 권선징악을 최대한 실현하며 검열관의 입맛에 맞는 작품을 만들 수밖에.
그러나 문제는 다음과 같다. ‘형님’이 자수하는 장면만큼이나 ‘불신을 유발하는’ 장면은 없다고 해도, 이 영화가 진지하게 생각할 경우 받아들일 수 없는 장면들이 꽤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생각했을 때, 이는 영화 속에서 ‘형님’ 만큼이나 ‘순박한 존재’로 재현되는 인물들과 연관이 깊다.
우선 영화 이야기를 해보자. <맨발의 청춘>은 다른 계층에 속해 있던 사람들끼리의 사랑이라는, 거의 고전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으며, 그 상황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대부분의 일이 벌어진다. 연애 대상들은 클래식을 들으며 주스를 마시고, 위스키를 마시며 복싱잡지를 읽는 서로의 생활양식을 재현해 본다. 하류층 사람이 상류층 사회의 문화와 충돌하는 장면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국이라는 음식이 존재하는 한국에서 국물 요리인 수프의 건더기를 손으로 집어먹는 장면을 넣은 건 조금 무리한 것 같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계층에 따른 생활양식과 사회적 위치의 차이가 연애의 장애물로 작용하며 이야기를 굴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익숙한 구도에서 눈에 띄는 것은 영화 전반에 나타나는 ‘순진함 혹은 순박함’이다. 이것이 60년대라는 시대가 낳은 것인지, 소설이나 시와는 다른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에 의한 것인지, 존재하던 장르 공식을 충실하게 따른 결과인지 모르겠으나, '순진함'이라는 특성이 영화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사살이다.
가령 영화 후반에서 신성일이 엄앵란을 때 버리기 위해 하는 일을 보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라’는 거창한 선언 뒤에 이루어지는 행위는, 밀수도, 살인도, 위계적인 폭력구조 속에서 떠받들어지는 것도 아닌, 술집여자에게 키스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물론 현대인의 관점에서 이는 성희롱에 해당하는 행동이다. 그러나 1950년대 손창섭 소설에서 악인들이 하는 행동은 장애인 여성을 매음굴에 팔아버리는 종류의 것이었다는 점을 비추어 봤을 때 (그리고 1960년대의 성인지 감수성이 그렇게 좋지 않았으리라는 사실을 고려해 봤을 때) 이는 비교적 순진한 행동의 범주에 들어서는 일이다. 그리고 이를 본 엄앵란의 순진한 반응을 보라. 엄앵란은 60년대식 남성성 과시라는 범주에 들어가는 이 행동이 대단한 외도라도 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인 채 떠나버린다.
그 외에도 엄앵란이 신성일에게 일자리를 잡아주는 행동을 보라. 이는 순진함이 두 측면에서 드러나는데, (1) 진심으로 신성일이 계심을 할 것이라 믿으며, (2) 계층과 상관없이 자신이 속한 사회가 남을 도와주는데 거리낌이 없을 것이라 믿었다는 것이다. 솔직히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 보면, 엄앵란이 사랑한 인물은 (타인으로서, 예측 불가능하고 위험할 수도 있는 자연인) 신성일이 아닌, 자신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백마 탄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다. 하기야 이는 모든 연예 과정 초기에 일어나는 현상일지도 모르겠다만.
엄앵란에 비해 신성일은 덜 순진한 존재로 드러난다. 자신의 방으로 찾아온 엄앵란에게, 자신은 구제불능의 전과범으로 살아갈 것이라 고백하는 장면을 보라. 그는 시계 밀수범으로 자수를 하고 들어간다고 해도 깡패 두목이 약속한 미래가 자신에게 오지 않을 것임을 안다. 그는 깡패 생활이라는 것이 (자신을 떠받들어주는 ‘동생’ 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안전한 것이 아님도 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시계를 밀수하는 도중에 위험에 처한 여성들을 구할 정도로 ‘어느 정도는 선량한’ 사람이다. (영화도 여기에 신경이 쓰였는지, 눈동자를 보니 피해 갈 수가 없었다는 단서를 붙이긴 한다)
심지어 역사를 고려할 때, 신성일의 ‘어느 정도는 선량함’은 거의 기적적이기까지 하다. 이승만 정권과 한 몸이었던 ‘깡패들’에 대한 분노는 이미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고, 박정희가 이에 편승해 ‘깡패들’을 ‘조리돌림’ 한 것이 1961년이었다. '진짜 뒷세계 거물'들은 ('이정재' 같은 얼굴 마담용 몇 명을 제외하면) 갖은 방법을 써가며 체제 안에 자리를 잡고 처벌을 피한 상황 속에서, '형님'의 명령을 받아 민주주의를 요구하던 시위대를 습격하고, 어쩔 때는 정치인까지 암살하던 '동생들' 중 1만여 명이 거리에서 조리돌림을 당한다. 분명 뒷세계 거물은 아니었을 신성일은 그 1만여 명에 속해 있었을까? 속하지 않았다고 해도 정치 깡패의 문제에서 자유로웠을까? 자유로웠다고 해도 깡패라는 조직을 향한 시선 속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물론 그 시선은 자기가 속한 깡패라는 집단이 자초한 것이긴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 채 좋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망가져 버리는 이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물론 영화는 이런 역사를 순박하고 순진한 태도로 표백해 버린다. 그리고 그렇기에 신성일은 순진한 인물로 자리하게 된다. 영화가 그리는 한국 사회가 정치권력과 결탁한 깡패들이 존재했던 세상이건,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세상이건 간에, 현실을 기억하는 관객들에게 그는 정치 깡패의 문제와 무관한 체로, 혹은 그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선함이라는 속성을 잃지 않은 인물로 남기 때문이다. 1964년의 관객들이 기억하고 있었을 험악한 세계를 고려하면, 그가 철저히 장르에 속해서 안전하게 구경할 수 있는 인물이든, 관객과 같은 현실을 겪은 인물이든 간에 그런 '어느 정도 선량한 깡패'의 존재는, 현실에 대한 순진한 상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순박하고, 순진한 인물들이, 1960년대라는 환경에서 온 것인지, 단순히 기존의 영화공식을 대입한 결과 등장한 결과인 것인지 필자는 모른다. 다만 다음과 같은 지점은 지적할 수 있을 듯하다. 이런 순박한 인물들에게 승리를 제공하는 대신, 비극을 제공함으로써, 영화는 “선량한 이들에게도 선량하게 대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비판을 내포하게 된다고 말이다.
물론 그것이 명시적인 체제 비판으로 향하거나, 주인공들이 그런 행동을 하게 한 법률과 사화 환경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데 까지는 나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의 검열 체계를 생각했을 때 <맨발의 청춘>이 거둔 성과는, 다른 60년대 초의 한국 영화들과 마찬가지고 기억할만한 값어치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