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나도 하던 밤샘이 싫었던 열일곱.
실내사이클을 타던 어느 날 오전 아홉 시, 내가 사는 지역의 평준화 고등학교 배정이 발표되었다. 결과는 3지망,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들 중 하나인 여자고등학교였다. 팔랑팔랑한 귀가 어머니의 말에 넘어가 대학 잘 보낸다는 사립 여자고등학교를 야심차게 1지망을 썼지만, 비슷한 내신 성적을 가진 친구들이 몰렸는지 칼같이 떨어지고야 말았다. '혹시라도 떨어지면 집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에 가야지'라는 생각으로 썼던 2지망 학교조차 나는 배정받지 못했다. 결국 나는 차로 2-30분 걸리는 구도심에 위치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30분이면 내 지역 끝에서 끝까지도 갈 수 있는 시간인데, 참 멀기도 했다.
생각치 못한 고등학교에 아쉬움이 있었지만, 한 가지 위안은 나의 고등학교에 기숙사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내 위의 언니, 오빠의 고등학교 기숙사 생활을 보며 자라난 로망은 자연히 기숙사 신청으로 이어졌으며, 넉넉한 수용 인원 덕에 가뿐히 입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이층 침대 두 개와 옷장만으로도 가득 찬 4인실 방에서 2021년 봄과 여름을 나게 되었다.
3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그때가 나쁘지 않았다고는 생각이 들지만, 자꾸만 나는 주류들과 어긋나곤 했다. 가장 큰 차이는 공부 시간대였다. 중학교 3학년, 코로나19를 계기로 저녁 8시에 자리에 눕고는 다음날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나의 루틴을 마치고서 공부를 하는, 소위 '미라클 모닝'을 장기간 지켜왔었다. 그러나 기숙사에서는 그런 생활이 가능할 리 없었다. 본교에서 이루어진 야간자율학습 이후에도 의무적으로 자정까지 자습실에서 모두가 공부를 해야만 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나란히 4행을 이루며 배치된 칸막이 책상 사이에서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생활에 처음에는 별 문제를 느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나의 로망 중 하나를 실현할 기회랍시고 설레하였다. 이산화탄소 가득한 자습실 안에서 같이 공부에 열을 올리는, 꽤나 고등학교스러운 모습이 아닌가? '아, 나도 더 앉아서 공부를 해야하는구나.'하며 며칠은 나도 함께 새벽 한 시, 두 시가 되어서까지 나의 구석진 안쪽 책상 자리에 앉아 그 열기에 가담을 하곤 했다.
그러나 점점 지치기 시작했다. '대체 왜 다들 자러 가지 않는 거지?' 내 딴에 계획했던 공부를 모두 마치고서 플래너를 덮고 나면, 언제나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긍정적인 공부의 동기라 생각했던 그 사람들이, 조금씩 불편해져만 갔다. 나는 자러 가고 싶은데, 자러 가면 내가 뒤처지는 게 아닌가? 공부 시간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내가 남들보다 '덜' 공부하면 상대적으로 공부를 '못'하게 될 가능성이 크지 않는지 매일같이 고민했다.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공부에 있어서 저녁과 밤보다는 눈 뜬 직후의 새벽과 아침이 잘 맞는다는 사실을. 일 년 넘게 지켜온 생활을 단숨에 남들따라 바꾸기에는 무리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힘듦은 그저 내가 감내해야 하는 것 그 이상 이하도 아니지 누가 알아봐주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욕까지 끝내 내려놓고서는, 결국 나는 기상과 취침을 남들과 달리 하기로 마음먹었다. 무언가 결정적인 계기가 있을 법도 한데, 좀처럼 생각나지 않는다.
의무적인 자습 시간이 끝나는 종만을 기다리며 수영에서의 마지막 100m는 무조건 대쉬라는 말마따마 없는 집중력을 다 끌어모으고서는, 그 누구보다 빠르게 자리 정리조차 안한 채 방으로 돌아갔다. 디지털 스톱워치의 알람, 아이패드의 알람을 여러 겹으로 설정해놓고서 잠이 오든, 오지 않든 눈을 감고서는 하루를 마쳤다. 초반 몇 번은 걱정이 앞섰다. 내가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나는 결국 남들보다 덜 공부하는 거였으니까. 그렇지만 그 압박을 일종의 도구로 삼아, 나는 새벽에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르면 3시, 늦으면 6시. 보통은 4시-5시에 일어나 국어 기출문제를 풀면서 시작한 나의 하루는 다행이도 점차 활력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절대적인 수면량 부족은 어찌할 수 없는 문제였지만, 여전히 공부 시간에 대한 불안함은 남아있었지만, 그럼에도 숨통이 트였다. 내가 오래간 좋아했던 초여름 새벽의 하늘을 볼 수 있었고, 빈 자습실에서 혼자 우물대며 엄마의 쿠키를 즐길 수 있었으며, 새벽 5시부터 학교 운동장으로 걸으러 오시는 아주머니들의 대화 소리를 백색소음 삼아 나의 시간을 온전히 보낼 수 있었다. 내가 나를 조절한다는 그 '통제감'이 무척이나 기뻤다.
뭐, 완벽한 편안함은 아니었다. 종종, 특히나 시험기간이면 내가 일어난 시각에 여전히 자습실에서 밤새 공부를 하던 친구들이나 선배를 보곤 했다. 초반의 나는 불안했다. 나는 이제 시작인데, 아직까지 했다고? 그러나 고등학교 입학 이래 첫 중간고사를 마치고서 받은 나의 성적표는 그 불안을 거의 완전히 잠재워주었다. '나, 이렇게 살아도 되겠구나.' 나의 자기조절이 확신을 주는 그 순간이 생생하다. 그 이후의 기상과 수면은 나에게 더는 스트레스가 되지 않았다. 내가 일어난 4시에 자러가는 친구와 웃으며 수고했다며 하이파이브를 하던 어느 날은 여전히 볼 때마다 미소가 지어지는 기억이다.
열일곱의 내가 보인 이 엇나감은 돌이켜보았을 때 많이 안쓰럽다. 시험 결과와 등수를 보며 '내가 틀리지 않았구나'를 안심하게 되는 결말이라서. 과정에 의의를 찾고 확신을 갖기에는 아직 어렸던 것만 같아서. 그렇지만 내가 용기내어 바꾼 생활이 내가 고등학교 생활에 있어 첫 엇나감이었고, 그 엇나감의 결과가 다행이도 나쁘지 않았던 덕에 그 이후의 엇나감들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었다.
이제 슬슬 그때 느낀 새벽 공기의 설렘이 그리워지고있다. 다시금 곱씹으며, 나의 아침을 온전히 보내는 생활에 대한 마음이 점점 달궈지고 있다. 그 달궈지는 감각을 잊지 않으면서 과거의 나에게 고마워하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