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짐
소화하는 삶을 지향하는 대학생입니다. 하루하루 흘러넘치는 자극들을 내 안에서 꼭꼭 씹어내지 못한 채 밖으로 보내버리는 일이 아쉬워 기록을 시작했습니다. 그 기록은 하나씩 쌓여 내 마음대로 살고 싶었던 고등학교 입시 생활,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해 맞닥뜨린 스무 살의 의예과 생활 일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뱉어낸 글자들은 아직 소화되지 못했습니다. 이제 단순한 일지 형식의 기록이 아닌, 정제된 글을 작성해 그때의 저를 소화해 주고 싶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 네이버 블로그의 '오늘일기' 챌린지와 함께 일상의 기록을 시작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중학생 때 다이어리와 스터디플래너에 써오던 공부 계획과 달성 기록이 하루를 남기는 전부였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잘 써야겠다는 그런 마음가짐은 어디에도 없었고, 그저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머무르며 먹은 것들의 기록, 그 사소한 기록이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더 즐거웠습니다. 당장 초등학교 수학여행의 기억을 떠올려보라고 하면 뭣 하나 제대로 생각나는 게 없는, 과거를 그다지 잘 기억하고 살지 않는 나에게 기록은 너무나 멋진 수단이었습니다.
실은 계속 목이 말라왔던 걸지도 모릅니다. 하루하루 분명 밀도 있게 살아냈다고 생각하는데, 일주일만 지나도 '그때 무엇을 간식으로 먹었더라?'와 같은 작은 일상의 조각들을 질문해 보면 답을 쉽사리 못 내렸습니다. 갈증이 났습니다. 그래서 나는 점점 그런 목마름을 채워주는 글자에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담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결코 짧지 않은 분량의 생각들과 사진들을 고등학교 1, 2학년동안 쉰여섯 편, 고등학교 3학년동안 스물두 편 남겼습니다. 매 시험이 끝날 때마다 내가 무엇을 공부했는지, 이번 시험 기간에는 유독 어떤 간식이 맛있었는지, 시험 끝나고 무얼 먹었는지... 누가 읽어주는 것도 아니면서 하나하나 기록했습니다. 그 버릇 어디 안 간다고, 여전히 기록은 진행 중입니다. 전라도에서 상경해 서울로 대학을 오면서도 매 열흘마다, 혹은 매주마다 일기를 써서 올렸고, 올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쌓인 글들은 이제 200여 개가 넘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의 기록들은 나에게 가치가 있을까? 타인에게 가치가 있을까? 섣불리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는 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직 그 글자들은 데이터 분석 이전, 0과 1로만 이루어진 날것의 글자 집합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이제 그 글을 소화하는 데에 오랫동안, 천천히 시간을 들여보고자 합니다. 가볍게는 마음에 드는 문장만 기록한 독서 기록부터, 무겁게는 의정갈등 아래 혼란 가득했던 의예과 1학년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일기까지 말이지요.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아마 끝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소화하는 동안 새로운 자극을 저는 계속해서 날것의 기록으로 남길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이제는 나의 글쓰기가 끝을 기약하지 않더래도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글을 쓰고자 합니다. 머릿속 생각을 마구잡이로 뱉어내지 않고, 한차례 두 차례 곱씹으며 글자를 쓰고자 합니다. 어렸던 나의 생각과 행동을 조금 더 가치 있는 글자 안에 담아내, 소화하는 삶을 다시금 지향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