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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억만개의 치욕 Sep 30. 2024

신짜오 비엣남-하노이 라이프

#1. 어쩌다 나는

코로나 19로 대륙간 이동이 까다롭기 그지없던 2022년 2월 11일, 나는 11살 딸아이와 단둘이 하노이에 왔다. 아들이 고3이었던 2021년 10월, 아들의 입시 준비로 자소서와 면접 코칭을 해주어야 했던 그 해 10월, 나도 자소서를 쓰고 면접을 보았다. 나는 대학에 입학했던 1998년도(98년도 신입학이라 면접은 97년도에 보았다)에 한번, 임용고시를 쳤던 2007, 2008년도(재수를 했으니 면접은 두 번 보았다)에 한 번씩 이렇게 총 세 번의 면접을 보았었고 내 인생에 더 이상의 면접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런 내가 자소서에 면접까지 보고 비자 발급을 위한 엄청난 서류들과 내 몸은 코로나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하다는 백신 접종증명서까지 준비했다. 모든 서류의 준비와 공증 과정이 만만치  않았으므로 두 번은 못할 거라 생각하면서도 주어지는 대로 해내고 있었다.


감염에 대한 공포보다 베트남의 코로나 정책에 대한 공포(그땐 믿거나 말거나 마구잡이로 수용소로 보낸다는 괴담도 있었기에)가 더 심난하기만 했던 그때, 긴장이 감도는 출입국 상황 속에서 백신 미접종자인 미성년 자녀까지 데리고 비 내리는 하노이 공항에 내렸다. 내려졌다.


결혼 20주년을 앞두었던 그 해, 나는 2년 간 근무하기로 한 하노이로 오기 위해 옷가지와 당장 필요한 물품들, 아이학용품 등만  챙겨 이민가방 두 개, 케리어 네 개에 배낭하나를 메고 입성했다.(코로나 19 뿐 아니라 아이 적응이라는 변수도 있었기에 언제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위안이었던 것도 같다) 2022년 2월 하노이에는 백신 접종자는 3일, 미접종자는 8일의 격리 규정이 있었다. 복잡한 준비 과정에다 8일간의 호텔 격리까지 감수하면서 이곳에 온 이유를…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심지어 죽고 못 사는 아들을 인천에, 나의 20년 지기 보호자 남편을 울산에 각각 두고 비행기를 탔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나는 아직 그 이유를 찾고 있다.


 이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2월 10일, 출국을 하루 앞두고 우리 네 가족은 인천 송도의 호텔에서 1박을 하고 마지막 만찬인 듯 인천의 비싼 한정식 집에서 거하게 점심을 먹고 공항으로 갔다. 혹시나 코로나 19에 감염될까 경계하면서도 마치 1주 후면 돌아올 듯, 담담하게 우리 넷은 공항 이별을 했다. 이 날 내 손안에 들어온 비행기처럼 세상이, 베트남이, 하노이가 내 손에 들어올 것 같았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과 앞으로 나에게 일어날 일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일었지만 내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한 결의를 다지며 그 어느 때보다 나의 정신은 예민하게 빛났다.


하노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대혼란의 광경이 펼쳐졌다. 당시 대한항공 전세기로 입국하였지만 7시 인천 출발 비행기는 11시가 넘어 도착하였고 공항 입국 심사와 도착 비자 발급을 위한 대기는 세 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여기저기 지친 사람들, 특히 어린아이들의 신음이 들렸다. 바닥에 앉아 잠이 든 사람들까지… 하노이 시간 새벽 2시가 넘어 직장에서 준비해 준 차량에 탑승했고 우린 호텔로 가 격리되었다. 8일간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한식과 베트남식이 푸짐하게 제공되는 삼시 세끼를 받아먹으며 8일간 방 안에서 아이와 둘이 격리되었던 그때. 넷플릭스로 드라마 정주행도 하고 베트남 정보도 리서치했다. 이 세상에 나와 아이 둘만 존재하는 듯했던 그 시간 나는 이 아이와 함께 버텨내야 할 시간들을 막연하게 그려보았던 것도 같다.


격리해제일. 나는 그 가방들을 끌고, 메고 일단 호안끼엠으로 갔다.(이미 격리 해제된 동료들은 집을 구하고 입주까지 마쳤다는데 집도 못 구한 내가 거주지역이 아닌 여행자의 거리로 간다 하니 다들 의아해했다) 호텔에 가방을 맡기고 오바마 분짜로 유명한 분짜 흐엉리엔을 먹고 일단 생각을 했다. 아니 생각을 해야 했다. 이제부터 뭘 해야 하는지…


하노이는 2016년 두 달간 배낭여행을 시작할 때의 출발지로 이틀 간의 짧은 여정으로 들렀던, 오직 사파를 가기 위한 중간지로만 기억에 남은, 나에게는 그다지 매력이 없는 도시였다. 그랬던 그때 머물렀던 곳이 호안끼엠이었고 성요셉 성당, 기찻길 마을, 동쑤언 시장, 맥주 거리 등이 기억 속에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여행자가 아니다. 비가 내렸고, 젖은 골목의 낯선 소리 낯선 냄새 속에 나를 꾸역꾸역 집어넣으며 베트남을 실감하기 위해 애를 썼다. 나는 여행자가 아니니까…


2022년 2월은 추웠다. 2016년에도 1월 초부터 시작한 여행이었기에 하노이에 겨울이 있고, 춥고 습하단 것은 알고 있어서 히트텍 내복과 캠핑용 전기요까지 챙겨 왔는데도 낯선 이 도시의 냉랭함은 얼음날처럼 날카롭게 피부를 찔렀다. 호텔의 히터로는 아무것도 데워지지 않았다. 낯선  이 도시에 덩그러니 우리 둘만 던져진 서러움 같은 것이 차올랐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격리 해제일로부터 3일 뒤 당장 아이를 두고 출근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이틀 안에 집을 구해 입주를 해야 했다. 격리하는 동안 켄텍해둔 한국인 부동산 실장(하노이는 한국 부동산이 많다)과 만나기로 하고 내가 생각해 둔 아파트 두 군데의 집 몇 개를 보기로 했다. 첫 아파트는 직장과 가까웠지만 집이 낡고 칙칙해 안 그래도 딸아이와 둘이 알 수 없는 서글픔으로 마음이 시린데 도저히 살 수가 없겠어서 조건을 걸었다. 첫째 안전할 것, 둘째 밝고 깨끗할 것, 셋째 한국인이 적을 것. 실장님은 내가 추려놓은 아파트가 아닌 다른 곳을 추천했고 혹시나 하는 맘에 보러 간 그 아파트가 나의 첫 하노이 집이 되었다.


당일 계약하고 이틀 뒤 입주했다. 당장 수건부터 밥그릇, 숟가락까지 모두 구입해야 했고, 그랩을 불러 가장 큰 쇼핑몰(하동 이온몰이었다)로 가 닥치는 대로 주워 담았다. 문제는 그것들을 옮기는 것부터였다. 소위 현타가 왔다. 차도 없는 데다 많은 물건을 당장 택시에 옮겨 실어야 했고, 그다음은 아파트 입구에서 집까지 옮겨야 했다. 택시 기사의 도움으로 일단 차에는 실었는데 집까지 옮기는 과정은 너무 힘들었다. 아파트 입구에 짐을 널어두고 아이에게 지키고 있으라 하고 몇 번을 왔다 갔다 했다. 그때 5학년이 되던 아이는 어렸고, 여기는 하노이고, 아직 아파트 출입구도 헷갈리는데 아이를 혼자 세워 두어야 하는 상황도 슬펐다. 마동석 같이 힘세고 자상한 남편 덕에 20년 동안 시장바구니는커녕 핸드백도 직접 안 들고 살았기에 이것이야말로 정말이지 현타 그 자체였다. (나는 결혼 20년 차 44세에 비로소 홀로서기를 하게 된다)


그렇게 대충 담아 온 살림살이를 풀옵션 투룸 아파트에 정리하고 몇 밤들을 잠 설치며 보냈다. 창밖의 소음, 복도의 인기척도 무섭고 불안했다. 남편이 없이 여자 둘이만 사는 집 티는 내면 안될 것 같아 방충망 설치 기사가 올 때조차 남편과 페이스톡을 하며 한 집 사는 척을 했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은 웃음이 날 일이다.


입주한 게 2월 21일이었고 나는 23일 출근했다. 여전히 코로나 19 비상시국이었고 아이들은 온라인 수업을 두 달이나 더 해야 했다. 나는 출근하고 아이는 집에서 온라인 수업을 했다. 우리는 저녁이면 동네 근처를 돌아보며 재래시장도 마트도 식당도 찾아 두었다. 그렇게 시간과 공간이 우리 몸으로 뚜렷이 지각되었던 시간들 속에서 조금씩 적응이란 걸 했나 보다.

그러고 벌써 2년 하고도 7개월째 나는 하노이다.


계약을 연장했다. 그것도 2년씩이나… 왜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 답을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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