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나뵈뵈 Dec 17. 2024

어느 날 털실이 나에게 왔다

- 한가한 날들의 소일거리

황보름 작가의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을 읽을 때, 서점에 와서 종일 퇴사 후 신의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명상을 하고 아크릴 수세미를 짜는 '정서'라는 인물이 무척 반가웠다. 그 책을 읽을 당시, 나도 여러 장의 아크릴 수세미를 짜 주변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털실'이 언제 나에게 왔던가?


시작은 <On Top of Spaghetti>라는 노래부터이다. 매년 11월 초에 있는 학교 축제에서 영어과 공연을 위해 이 곡을 선택했다. 이 곡우리 둘째 셋째가 2학년일 때 공연했던 곡이기도 한데, 그때 그 공연이 인상에 남아서  6년 후에 내가 가르치게 된 2학년 학생들과 공연을 준비하였다.

 

치즈 범벅 스파게티 위에

얹어져 있던 미트볼

누군가 재채기하는 바람에

굴러 떨어져 식탁 밑으로,

문 밖으로 굴러 정원에까지,

덤불 밑으로

구르고 굴러 뭉개져 버렸다네.


맛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네.


다음 해 여름,

미트볼이 있던 자리에서 나무가 자라나더니

줄기엔 이끼가 가득 덮여 있고

나무엔 토마토소스 묻은 미트볼이

주렁주렁 열렸다네.


그러니

치즈 범벅 스파게티를 먹을 때,

재채기가 나오려거든

스파게티 위에 얹어진 미트볼을 

꼭 붙들어 주세요.

(또 굴러 떨어지지 않게~~)


누군가의 재채기 때문에 슬픈 운명의 시간을 보내지만, 다시 재생산되어 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미트볼을 상상해 낸 재미있는 가사다. 여기에 쿵 짝짝 쿵 짝짝 3박자 리듬이 저학년이 맞춰 동작하기에 적절한 곡.

리듬과 가사어울리는 율동 동작을 만들어 연습시키고, 공연 소품으로 식탁 위에 미트볼 스파게티 모형을 준비했다.


미트볼은 종이를 둥글게 접어 갈색으로 색칠하고, 노란색 털실로 스파게티 면을 표현했다.


그때 사용하고 남은 노란색 털실

(교실 정리함에 몇 달을 잊힌 채 어둠 속에서 지내고 있던)

코바늘!!

(어느 날, 막내 방에서 막내가 초등학교 수예부 방과 후 수업을 들을 때 사용했던 물건들이 가득한 꾸러미에서 발견한)




이 털실과 코바늘이 다시 나를 타임머신을 태워 어릴 적 시골집 작은 방 따뜻한 아랫목으로 데려갔다. 농한기인 겨울철이면  엄마나 언니들이 대바늘로 조끼를 짜고 목도리, 장갑을 짜던 모습, 코바늘, 털실, 코바늘 도안이 담긴 책이 방바닥에 널려 있어 만져 보고 넘겨 보던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


정식으로 배운 적도 없는데, 어릴 적 그 기억이 나를 끌어당긴 것인지 설명할 수 없는 호감으로 내 손은 코바늘과 털실을 잡아 코를 만들고 한 코 한 코 짜 내려가고 있었다. 바늘을 실 밑으로 넣고 실을 코바늘 훅에 감아 코 안으로 끌어당겨 빼고... 어! 뭔가 될 것 같은데?

그렇게 시작한 코바늘 뜨기.

인터넷을 검색해 가장 간단한 뜨기 방법을 익히고 나서,

시간 날 때마다 원형 수세미, 작은 주머니 등을  짰다.


고수들은 정확한 공식을 가지고 코를 세어서 완벽한 모양을 만들어 내며, 코바늘로 만들 수 있는 작품 인형, 가방, 테이블보, 방석 커버 등등 무궁무진하다는 사실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왕초보로서 첫걸음을 떼고 있던 나는 일단 모양이 조금이라도 나오면, 됐다! 이 정도도 훌륭해! 하면서 늘 뭔가 2% 부족한 작품이라도 완성하는 것에 만족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이거 제가 짰어요. 설거지할 때 사용하세요! 하면서 지인들께 드리고, 생일 맞는 동료샘이나 송별 선물로도 작은 주머니를 드리면서 스스로 뿌듯해했다. 받는 분들이 털실의 밝은 색감, 촘촘히 정성스레 짠 작은 선물에 "어머, 예뻐라! 이걸 손수 짜셨어요? 감사해요 ~~."  이런 반응을 보여 주시니 더욱 흐뭇했다.

원형 수세미

원형 수세미, 작은 주머니나 가방 다음으로 시도해 본 건 래니 스퀘어 (Granny Square). 이것은 코바늘로 중앙부터 바깥쪽으로 뜬 정사각형 모양의 직물을 일컫는 말이다. 이름을 들으면 외국 그림책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줄 달린 돋보기안경을 쓰고 뜨개질하시는 할머니가 바로 생각난다. 그래니 스퀘어라는 이름은 오래전 유럽에서 가난한 시절에 정사각형 모양을 여러 개 짜 꿰매어 이불을 만든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오른쪽 하단: 그래니 스퀘어

원형만 짜다가 사각형을 짜니 좀 새로웠고, 아직 연결해서 테이블보나 이불은 못 만들어 보았지만 기회가 된다면 시도해 보고 싶다.


털실이 나에게 찾아온 후로, 중국에서 머문 시간의 후반부동안 코바늘 뜨기가 한가한 날들의 소일거리가 되었다. 실만 생기면 무언가를 짰다. 물론 실력은 처음 시작했을 때와 별 차이는 없었지만, 유튜브 영상을 가끔 참고하면서 새로운 모양을 시도해 보곤 하였다.

어느 때는 영상에서 보여주는 작품이 무척 예뻐 따라 해 볼까 생각하여 시작했다가 절망하는 때가 있었다. 아, 이건 나의 가벼운 취미로 남아 있어야지 고수들의 전문적인 작품과 같은 것은 절대 못 따라가. 나의 한계치가 있어. 한 단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이해력과 정확성, 끈기가 필요한 데 그게 안돼.




한국으로 돌아온 뒤 코바늘 뜨기를 거의 하지 못했다. 내 소우주안에 있는 한국의 시계와 중국의 시계가 달라서인 듯하다. 한국의 시계는 왜 이리 바쁘게 돌아가는 것일까? 소파에 앉아 고요히 무념무상하며 뜨개질할 여유가 없으니 말이다.


겨울방학이 다가오고 있다.

나의 한가한 날들의 동반자였던

오색 털실과 코바늘이 그리워지고 있다.

다시 시작한다면, 멋진 작품을 내기 위해 스트레스받지 말자.

처음 가볍게 사랑하고 부끄럼 없이 뿌듯해했던 그 마음만 간직하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