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 성향 존중하기 (1)
우리는 누구나 태생적으로 혹은 후천적으로 신체 혹은 정신에 손상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손상'이 특정한 사회적 환경과 조건에서는 장애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사자는 날개가 없다는 '손상'이 있는데 정글에서는 날개의 손상이 아무 문제도 아니지만 새들의 왕국에서는 날개의 손상은 '장애'가 된다. 따라서 장애와 장애인을 만드는 것은 손상 그 자체가 아니라 손상을 부각하는 사회적 환경과 구조이다.
이렇게 이론적으로 보면 장애는 개인의 책임이 아니며, 동정의 대상도 아니고 열등함의 상징도 아니다. 따라서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고 숨겨야 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장애를 숨기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자폐스펙트럼장애의 경우 유병율이 100명당 서너 명에 달할 정도로 흔하지만 우리는 주변에서 본인이 자폐임을 밝힌 사람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사회가 자폐스펙트럼장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매우 고정적이다. 대부분의 매체에서 자폐인은 일상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으며, 어떤 한 가지 분야에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영화 “말아톤”의 주인공, 초원이가 대표적인 예시다. 최근에는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 자폐를 가진 주인공 진태도 초원이처럼 일상적인 소통은 어려우나 피아노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서번트 증후군으로 그려졌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는 자폐를 다룬 이전의 영화들과는 달리 자폐인 우영우가 일상적인 소통은 가능한 것으로 그려졌으나 그녀 역시 천재적인 암기력을 가진 서번트 증후군을 가진 설정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영화나 드라마와는 매우 다르다. 자폐인은 일상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것처럼 묘사하는 대중매체와는 달리 실제로는 자폐인의 상당수가 또래 수준의 일상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인 자폐인의 50 퍼센트는 평균 이상의 지능을 가진 고기능 자폐이며 경계성 지능까지 포함한다면 전체 자폐인의 70 퍼센트 이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중매체는 자폐인의 현실보다는 사회에서 생각하는 "자폐다움"에 대한 고정관념을 더 많이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대중매체는 자폐인들이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것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상은 대부분의 자폐인들은 천재가 아니다. 신경정형인중에서도 극히 일부분의 사람들만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것처럼 자폐인의 경우에도 극히 일부분의 사람들만 천재성을 가진다. 따라서 대중매체가 그려내는 자폐인은 천재라는 설정은 사회에서 생각하는 "자폐다움"에 대한 또 다른 고정관념이다.
이러한 고정관념과 편견이 가득한 세상에서 자폐스펙트럼의 범주에 있는 아이들은 진단명을 공개하는 순간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 “소통이 불가한 사람”, 그리고 "천재적인 재능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라는 편견에 맞닥뜨린다. 이는 많은 보호자들이 아이에게 사회적 도움이 필요함을 인정하면서도 아이의 진단 여부를 기관에 공개할까 말까 고민하게 만드는 이유 중의 하나다.
하지만 자폐스펙트럼장애(Autism Spectrum disorder)는 그 이름처럼 다양한 특성을 가진 사람들을 포함하는 장애이다. 자폐스펙트럼장애 진단을 받은 아이들의 공통점은 사회적 의사소통 및 상호작용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며 그 외에 아이들의 언어능력, 인지기능, 감각처리능력, 성격 등은 다채로울 수밖에 없다. 앨리스는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아이들 중에서도 또래 수준으로 말을 할 수 있고, 평균 지능을 가졌으며, 자신의 감정표현도 잘하는 아이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지 않을 때는 적절하지 않은 감각추구를 하기도 하고, 자기 과시용 언어를 많이 쓰며, 놀이를 할 때는 놀이주도권을 독점하려는 경향이 있다.
자폐스펙트럼장애가 이렇게 다양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정확한 진단은 매우 중요하다. 양육자인 나는 정확한 진단을 통해 아이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고, 아이와 제대로 소통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으며, 비로소 아이의 어려움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앨리스와 주기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앨리스와 제대로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었던 것도 앨리스가 정확한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아이의 자폐 진단은 나에게 큰 의미가 있다.
아인슈타인, 뉴턴, 엘런 튜링, 비트겐슈타인... 이 위인들의 공통점은 모두 자폐 증상이 있다는 것이다. 스티브잡스, 빌게이츠, 일론 머스크까지.... 자폐스펙트럼 증상을 가지고 있는 현대의 유명인사는 끝도 없이 많다. 그리고 앨리스와 같이 평범한 아이들까지 포함한다면 이 세상엔 정말 다양한 범주의 신경다양인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제는 정말로 사회가 만든 자폐인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할 때이다. 그리고 비자폐인에 맞춰진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실제 자폐 당사자들의 목소리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자폐인들은 아주 평범한 우리 사회의 일부분이다. 하지만 자폐인을 평범하게 보지 않는 사회적인 시선과 환경은 자폐인들을 숨어서 지내도록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숨어 살수 밖에 없었던 자폐인들이 더 많이 세상으로 나올 수 있도록 사회적 환경과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새들의 왕국에서 날개가 없다는 '손상'으로 인해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자처럼 자폐인들도 사회성이라는 '손상'으로 인해 장애를 가지고 비자폐인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자에게 정글이라는 환경을 제공해 준다면 사자는 정글의 왕이 될 수도 있다. 자폐인에게 자폐인을 위한 적절한 사회적 환경을 제공해 준다면 어떤 일이 생길지 생각만 해도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