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중음악의 특징을 연재하면서 이야기하지 않은 인물이 있었죠.
그녀의 이름은 '왕수복.'
많이 망설이다가 오늘은 그녀의 이야기를 한번 해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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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수복이라는 이름 들어보신 적 있을까요.
없으시죠. 지금은커녕 웬만큼 나이 있는 분들도 “누구?” 하고 고개를 갸웃하실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 1930년대 조선과 일본 전역을 들었다 놨다 했던 목소리의 주인입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유행가의 여왕’이라고 불렀죠.
하지만 그 별명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러닝타임이 86년인 한 편의 영화.
장르를 고르자면? 멜로와 음악, 시대극이 뒤섞인 대서사시의 진주인공.
1917년, 평안남도 강동군.
화전민 집안에서 태어난 왕성실이라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명륜여자공립보통학교(명륜진사갈비가 생각이 나네요)를 다니다가 어머니 손을 잡고 학교를 그만둡니다.
그리고 향한 곳이 평양 기생학교.
그것도 1기생입니다.
거기서 가야금, 무용, 민요, 시창을 배웠죠.
그런데 단순히 기술만 배운 게 아니었어요.
무대 위에서 관객의 시선을 붙드는 법, 숨을 삼키는 순간의 표정, 그리고 노래가 끝난 뒤 남는 여운까지—그걸 몸에 새겼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예술고등학교와 아이돌 연습실을 동시에 다니는 셈이죠.
1933년, 그녀는 열일곱 살이었습니다.
포리돌 레코드 스튜디오.
엔지니어가 바늘을 쉘락판 위에 내려놓습니다.
‘고도의 정한’, ‘인생의 봄’.
첫 소절이 마이크를 타고 들어가자 방 안의 공기가 변합니다.
곡은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판매량은 120만 장.
그 시절 인구를 생각하면 거의 모든 집에 그 목소리가 울린 셈이죠.
이듬해엔 ‘아리랑’을 불러 경성방송국 한국어 제2방송 개국 첫날 전파를 타고 일본 전역으로 퍼집니다.
전축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건 단순한 멜로디가 아니었어요.
시대의 공기, 그리고 그 공기를 뚫고 나오는 한 줄기 목소리였습니다.
1935년, 삼천리라는 잡지 인기투표.
남녀 가수 통틀어 1위.
이난영, 선우일선, 전옥 같은 쟁쟁한 가수들을 제쳤죠.
이쯤 되면 왕수복이라는 이름은 곧 유행가의 대명사가 됩니다.
거리 전축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음반 가게 진열대 위에는 웃는 얼굴이 놓여 있었죠.
하지만 그녀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벨칸토 창법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스승은 벨트라멜리 요시코.
기생학교에서 다져진 기초 위에 서양 성악 발성이 얹히자 목소리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숨을 깊게 마시고 가슴과 복부를 울려 성대를 여는 방식.
민요를 부르는데도 소리가 무대 끝을 넘어 관객의 뒤까지 도달했습니다.
‘본조아리랑’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건 민요라기보다 동양과 서양이 한 호흡 안에서 만나는 예술가곡이었어요.
그리고 사랑.
1940년부터 2년 동안 그녀는 소설가 이효석과 연애를 합니다.
마치 장면마다 불꽃이 튀는 영화 같았죠.
그의 마지막까지 곁을 지켰습니다.
이효석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시인 노천명의 약혼자였던 김광진 교수와 결혼합니다.
이름 셋이 얽힌 이 관계는 문단의 가십난을 달궜고 진실과 소문은 늘 뒤섞여 떠돌았습니다.
해방이 왔지만 곧 분단이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김광진 교수를 따라 북쪽에 남았습니다.
1953년, 북한 중앙라디오 방송위원회 전속가수.
1955년, 국립교향악단 성악가수.
소련 순회공연에 마흔셋에는 공훈배우 칭호까지.
김일성 부자로부터 환갑·칠순·팔순 생일상을 다 받았습니다.
북한에서 예술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예우를 받은 셈이죠.
하지만 남쪽에서는 완전히 잊혔습니다.
월북자라는 꼬리표 하나로요.
1965년, 남편과 판문점 관광을 하다가 언론에 찍힌 게 거의 유일한 기록입니다.
그것도 신문 귀퉁이 칼럼에 짤막하게 실렸을 뿐이었죠.
2003년, 그녀는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애국열사릉에 묻혔죠.
북쪽에선 마지막까지 ‘예술가 왕수복’이었지만 남쪽에선 이름조차 사라진 인물.
그녀의 노래는 다른 가수들에 의해 이어졌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오랫동안 침묵 속에 있었습니다.
왕수복이라는 인물은 조선의 전통과 서양 성악, 예술성과 대중성, 사랑과 정치, 남과 북이라는 경계를 모두 걸어간 사람이었습니다.
평양 기생학교 1기생에서 당대 최고의 가수로, ‘유행가의 여왕’에서 ‘공훈배우’로.
그리고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가 이제야 조금씩 이름이 불리고 있죠.
라디오와 레코드판에서 한 시대를 울리던 그 목소리를 지금 우리가 다시 듣는다면—그건 단순한 옛 가수의 노래가 아닐 겁니다.
격변의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낸 한 여인의 증언.
그리고,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이 이름을 잊고 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