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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나윤 Oct 11. 2024

퇴사 직전, 우주가 나를 파리로 부른 이유

분노의 직장인, 파리에 가다.

퇴사 직전, 벼랑 끝에서 내려온 동아줄



사가기싫어병이 화병이 되기까지


그 해에도 나는 극심한 회사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급기야는 원인 모를 통증에 심장내과 등을 전전하기에 이르렀다. 업무 시즌이 끝나자마자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통증, 역시나 회사병이었다. 한때 원했던 회사, 사람들 너무 좋은데, 7년 내내 회사가기싫어병을 앓다. 입사 초반부터 어렴풋이 만 외면고 있었다. 모두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회사 가기 싫다'와 나의 궁서체 '회사 가기 싫다'는 무게감이 조금 다르다는 걸. 나는 신적 고통을 마비시키기 위해 회사 밖에서 온갖 자극적인 취미를 기며 태롭게 버텨갔다. 리고 승진던 날, 기쁘기는커녕 오히려 눈앞이 캄캄해지던 그날에서야, 마침내 덕업일치 실패를 인정하였다. 좋아하는 일도, 잘하는 일도, 그리고 잘하고 싶은 일도 아니다는 것을. 알량한 책임감과 어설픈 완벽주의의 힘을 빌려 꾸역꾸역 버텨 낸 직장생활, 어느 날 거대해진 결핍과 만성적인 분노가 그만 폭발해 버렸다.

분노의 폭주 : 출국 직전 1달 동안 3번의 공연을 올리고, 1번의 시험을 치렀다. 물론, 출국 전날까지 풀로 출근을 했다.


홧김에 지른 프랑스어 어학연수


직장생활의 벼랑 끝에서, 나는 뛰어내릴 작정이었다. 당장  먹고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고통스러운 분노와의 전쟁을 종전시키기 위해 '올해 안에 무조건 퇴사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말이라도 씨가 되라고. 그렇게 벼랑 끝에서 10, 9, 8, 7, 카운트다운을 세고 있는데, 맙소사,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올 줄이야! 절박한 마음으로 썩은 동아줄이라도 좋으니 '잠깐만 좀 살려주세요!' 외치며 덥석 동아줄을 붙잡았. 그렇게 홧김에, 무언가에 홀린 듯 아주 충동적으로, 프랑스어 어학연수를 질러버렸다. 마치 온 우주가 나를 파리로 인도하기 위해 모든 것을 계획해 둔 것처럼, 절묘한 타이밍에, 확률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의 우연이 겹쳐, 나는 갑작스럽게 파리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학창 시절부터 가늘게 이어져 온 프랑스와의 인연, 어쩌면 모두 의도적으로 마련된 복선장치였을까? 나는 7년 직장생활의 끝에 찍으려던 마침표를, 7개월 파리살이라는 쉼표로 고쳐 찍었다.

첫 날 수업을 마치고




낮에는 어학연수생



언어, 문화, 그리고 인생 수업


다시 학생이라니, 날아갈 듯이 기뻤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터져 나오던 한숨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처럼 괴롭던 출근길도, 내일이 무서워 잠들 수 없던 밤도, 모두 끝이! 일개 부품으로 소모되던 사무실을 벗어났다는 사실만으로 동태눈깔에 다시 빛이 돌기 시작했다. 첫 수업부터 언어를 배우는 즐거움에 도파민이 분출되었는지, 화병이 싹 치유되어 버렸다. 나에게 어학연수는 언어를 넘어 문화 그리고 인생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과장을 좀 보태면, 모든 자질을 발굴하여 육성한다는 '전인교육' 그 자체였달까. 프랑스어로 빅토르 위고의 문학을 감상하고,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분석하고, 파리의 거리 예술가에 대해 발표하고, 예술가 아틀리에로 현장수업을 떠나면서 자연스럽게 파리의 문화 속에 스며들 수 있었다. 프랑스어로 전 세계에서 모인 남녀노소 학생들과 이야기하고, '나'에 대한 에세이를 쓰면서 새로운 시각에서 자아와 인생을 탐구할 수 있었다. 눈을 뜨면 하루가 기대되는 아침, 매일 설레는 등굣길, 하루를 마치기 아쉬워 잠들 수 없는 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현장수업으로 방문한 아틀리에, 과제는 아티스트와 대화하기


일상이 여행이요, 여행이 일상인 삶


학교가 파리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덕분에 나는 일상이 여행이요, 여행이 일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매일 등하굣길이 낭만 그 자체였던 것이다. 여행자 모드일 땐 매일 등하굣길에 파리를 조금씩 뜯어먹듯 여행하는 코스를 짰다. 조금 일찍 나와 에펠탑 피크닉하기, 튈르리정원 산책하기, 테라스카페 도장 깨기 등의 일정을 소화하고 등교한다거나, 수업을 마치고 오르세 미술관 전시보기, 몽마르트르 언덕 야경보기, 히든바 도장 깨기 따위의 미션을 완수하고 귀가하는 식이었다. 현지인 모드로는 주로 하굣길에 파리지앵들 또는 이방인들의 모임을 여기저기 기웃거렸는데, 언어교환 모임 나가기, 러닝크루랑 센느 강변 달리기 등은 거의 매주 루틴처럼 굳어졌다. 백여 명의 파리지앵들 틈에 끼어 달리다가 루브르 박물관 등 관광객들의 박수세례를 받는 구간을 지날 때면, 나도 이제 파리 사람이 다 된 것 같았다. 파리의 시간은 집에 붙어있을 틈도 없이 바쁘게 흘러갔다.

러닝크루 크리스마스 특집 : 산타모자를 쓰고 달렸다.


밤에는 아마추어 아티스트



아티스트웨이 독서모임 : 잃어버린 창조성을 찾아서


출국 직전 터질 듯한 캐리어에 1권의 책을 쑤셔 넣었다. 몇 년 전 코로나로 독서모임이 취소되어 조용히 책장을 지키던 책 '아티스트웨이'가 갑자기 눈에 들어온 것이다. 이 책은 작가의 12주 창조성 회복 워크숍을 활자로 옮긴 것인데, 매일 무의식의 소리를 받아 적는 '모닝페이지'와 매주 내면의 어린 아티스트와 놀이를 즐기는 '아티스트 데이트'를 기본으로 한다. 온통 프랑스어로 도배된 소셜 모임 플랫폼에 거짓말처럼 영어 모집글이 올라왔는데, 하필이면 그게 '아티스트웨이' 독서모임일 줄이야! 그렇게 나는 런던에서 온 S, 뉴욕에서 온 B와 매주 수요일 저녁 오페라역 근처 카페에서 영혼의 대화를 나누게 된다. 우주가 나를 파리까지 부른 이유는 아마도 이 친구들을 선물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들 덕분에 나는 3년간 막혀있던 미완성 자작곡을 완성하고 새로운 노래를 2곡이나 더 만들었다. 어느 날은 생애 첫 소설을 쓰고 싶다는 충동을 마주했는데, 갑자기 심장이 쿵쾅대면서 어디선가 이야기가 들려와 미친 듯이 받아 적는 기이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이 여정의 가장 큰 수확은 무의식의 패턴에서 힌트를 얻어 비전공자 신분으로 겁도 없이 대학원의 문을 두드리게 된 것이다.


아티스트웨이 독서모임을 마치고

춤추고, 노래하고, 연기하며


회사를 도려낸 나머지 일상 몽땅 파리에 옮겨 심었다. 회사의 여집합은 주로 춤, 노래, 연기 등 잡다한 취미들이었는데, 들은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사냐'고 묻는 실속 없는 뻘짓들이었다. 아무튼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나는 당당히 내 갈 길을 갔다. 레퓌블리크 광장에서 스윙댄스를 추다 100세의 할아버지와 홀딩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고, 오픈마이크 바에서 기타를 치며 프랑스어로 쓴 자작곡을 노래하기도 하고, 프랑스 연극 연기 프랑스어를 연습하기도 했다. 그 때 우주가 또 다른 선물을 보내왔다. 파리를 놀이터 삼아 온갖 놀이를 즐기는 꼬꼬마 아티스트를 향해 따뜻한 응원을 건네는 지지자들 연속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 누가 뭐라 해도, 절대 노래를 멈추지 말라'던 보컬 선생님 M, '당장 SNS에 아티스트 계정부터 만들라'던 오픈마이크바 게스트 A, 수업시간 나의 '연기에서 재능을 봤다'던 극작가이자 프랑스어 선생님 S.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한마디 한마디가 나를 조금씩 일으켜 세웠다. 우주가 나를 파리까지 불러서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봤지? 너는 그냥 하고 싶은 놀이를 계속하면 돼."

달리기 끝나고 집에 가기 전에 오픈마이크 바에 들러 노래를 한 곡 불렀다.


주말에는 여행가



주말치기로 프랑스 한 바퀴


사실 대학생 시절 교환학생으로 프랑스에 잠시 살았었는데, 그 당시에 유럽 여행에 정신이 팔려 정작 프랑스 여행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 두고두고 아쉬웠다. 그래서 번에는 프랑 한 바퀴 돌기를 목표로 주말마다 부지런히 여행을 다녔다. 한국인 투어 껴서 몽생미셸 파리 근교, TGV, 야간버스를 타고 니스, 릴, 마르세유, 보르도, 샤모니, 아비뇽  도시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워 참 부지런히도 돌아다녔다. 잠은 한국 가서 자면 된다고 스스로 세뇌시키면서. 대부분 혼자 떠난 여행이었지만,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동행들, 프랑스어 실전 연습을 도와준 친절한 현지인들, 그리고 아름다운 풍경 덕분에 외로울 틈 없이 미션 클리어! 오랜 숙원사업을 해치웠다.

니스에서 해야 하는 일 : 1. 꽃시장에서 꽃을 산다 2. 스냅을 찍는다


여행에서 남는 것은 사람뿐


이왕 유럽 땅을 밟았으니 변국들도 두루 섭렵하여 뽕을 제대로 뽑야 했다. 독일 크리스마스 마켓 투어, 해리포터의 고장 에든버러에서 소설쓰기 여행, 노르웨이 오로라 여행, 몰타 휴양 여행, 초단기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 모로코 사막 여행 등 모든 여행에는 테마를 부여했다. 여행을 통해 얻은 것은 사람들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의 이야기. 여행 중에 참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람들을 만났다. 숙소를 뛰쳐나와 공항에서 노숙하게 만든 노르웨이의 분노조절장애 에어비앤비 호스트부터,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우리의 만남을 노래로 뚝딱 만들어 준 이탈리 싱어송라이터까지. 그들을 통해 여러 주제 중에서도 특히 '일이란 무엇인가' 따위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다. ' 재밌?'부터 시작해서 인터뷰 하듯 직업관 캐물으면. 대부분은 자신의 일을 좋아다고 말했다. 적어도 나처럼 괴롭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 대화들은 책 몇 권 읽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5일짜리 산티아고 순례길 첫째 날 : 길 위에서 만나 5일을 함께 한 사람들




직, 또다시 벼랑 끝으로



우주의 장난... 여전히 해석 중인 그 메세지


모로코에서 마지막 여행을 마치고 인천행 비행기를 타러 야간버스에 몸을 실었다. 막 눈을 붙이려는데,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복직 발령 안내였다. 회사병에서 완치된 나는 의연한 마음으로 메시지를 클릭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우주의 배신인가! 직장생활을 통틀어 가장 괴로웠던 부서에 재배치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었다. 밀려는 공포에 그 날 야간버스에서 한숨도  수 없었다.

비보를 접하기 전 마지막 여행지에서

충격이 가시지 않은 채 귀국 다음 날 대학원 면접을 보러 갔다. 면접관 중 한 분이 질문했다. "M분야 연구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혹시 선행연구는 찾아보셨나요?" 솔직하게 대답했다. "찾아보긴 했는데... A교수님 논문 하나밖에 없더라고요." 옆에 계신 교수님과 웃으며 말씀하시길, "이분이 그 교수님이세요." 헛웃음이 나왔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우주의 선물인가! 복직 첫날, 일단 홧김에 성우학원에 등록해 버렸다. 고1 때쯤 무시했던 안의 어린아이가 제안한 그 놀이를 한번 시작해 보려고. 그리고 여전히 모닝페이지를 쓰며 나를 들었다 놨다 하는 우주의 메시지를 해석 중이다. 도대체 무슨 큰 그림일까? 그 뜻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아 나는 내일도 출근을 한다.



현실엔딩, 그럼에도 내가 파리에서 얻은 것


나는 그 자리에 다시 그대로 돌아왔다. 영화같은 반전 따위는 없는 지극히 현실적인 엔딩이다. 예정대로 복직을 했고, 여전히 오만가지 취미로 분노를 잠재우며, 우주의 배신으로 심리상담 선생님의 도움 받고, 또 몸이 반응하여 병원을 전전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단단함과 여유를 느낀다. 프랑스어 시험에 합격하고, 첫 자작곡 녹음을 마치고, 대학원에 입학하고. 파리에서 품은 새로운 꿈들 덕분에 결핍의 구멍이 메워졌고, 분노도 곧잘 사그라든다.  


파리에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이 있다. 바로 파리를 떠나 서울에서 사는 것이 꿈인 친구들도 있다는 것. 내가 파리를 그리워하듯, 그들은 서울을 그리워했다. 나의 현실이 그들의 이상이요, 그들의 현실이 나의 이상인, 참 묘한 상황이다. 결국 우리가 공통적으로 원하는 건, 기존의 허물을 벗고 새로운 나를 찾고 싶은 낭만적인 마음가짐이 아닐까? 파리살이 제1의 목표는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들 골라하기'였다. 그렇게 나는 철판 깔고 문 두드리고 다녔다. 동양인은 나뿐인 오픈마이크 바에 혼자 찾아가 손을 번쩍 들고 노래겠다고 외친 것도, 반도 못 알아들을 영어 독서모임에 무작정 나가본 것도, 한국에 돌아온 지 6일 만에 '연기로 배우는 프랑스어' 수업을 들으러 덜컥 다시 파리행 비행기에 올라탄 것도, 대학원에 될 대로 되라며 지원해 본 것도. '파리여서'가 아니라 '마음먹어서' 가능했던 것들이었다.

1년에 한 번 볼 수 있는 핑크 에펠

스스로에게 되물어본다. 나는 파리에서처럼 용기 있게 문을 두드리고 있는가? 파리에서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내면의 소리를, 배우려는 마음으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가? 파리에서처럼 설레는 여행자의 마음으로 일상을 살아봤는가? 그나저나, 요즘 내 안에 새로운 아티스트 자아가 자꾸 이야기를 하고 싶단다. 그리하여 이 글을 시작으로, 벌써 오래된 꿈처럼 느껴지는 나의 파리살이 에피소드를 차근차근 풀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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