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인’과 ‘회색 인간’, 두 극단의 화해를 통해 이뤄가는 정체성
‘예술’을 하는 사람은 ‘시민’과 다른 종류의 사람인걸까? 그 둘은 절대 만날 수 없는 평행선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일까? ‘주변인’은 평생 동경하는 다른 세계에 입주하지 못한 채 ‘주변인’으로서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회색 인간’은 평생을 안주하지 못한 채 살아야 하나? 그건 너무 괴로운 삶이 아닐까?
토니오 크뢰거는 예술가이다. 그는 여행 중에 들린 고향에서 도주하는 용의자로 의심을 받는 등 일반인, 즉 시민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그는 예술의 상대적인 개념을 시민으로 본다. 시민들은 예술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완전한 예술을 위해서는 시민성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미학적 형상물을 만들어 내려면 유희적이면서도 차분한 태도로 우월한 입장에서 이러한 소재를 짜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 감정 말입니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따듯한 감정은 언제나 진부하고 쓸모없는 겁니다. (…) 난 인간적인 것에 동참하지 않으면서 인간적인 것을 서술하느라 가끔 죽도록 피곤합니다.’
토니오 크뢰거 자신도 본인이 ‘시민’들과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문학이란 결코 천직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 당신은 자신에게 낙인이 찍혀 있다고 생각하고, 왠지는 잘 알 수 없지만 평범하고 정상적인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다르게 느끼기 시작합니다. 당신을 다른 사람들과 멀어지게 하는 아이러니, 회의, 갈등, 인식 및 감정의 골이 점점 더 깊게 벌어져 당신은 고독해 집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더는 말이 통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가 끌리는 이유>라는 노래 제목도 있듯이, 역시 사람은 반대가 끌리게 되나 보다. 토니오 크뢰거는 특히 어린 시절에 그런 ‘불타오르는 질투심이 섞인 동경’이 심했다. ‘푸른 눈에 금발’인 사람들이 갖는, 세상 사람들과의 ‘정상적이고 행복한 관계’를 동경한 것이다. 그는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 다가오는 것은 오히려 내치기도 하면서, 닿을 수 없는 세계의 사람들-대표적으로는 한스 한젠과 잉에보르크 홀름-만을 바라보고는 했다.
그렇다고 그가 ‘시민’ 세계로 들어가려는 노력을 했냐 하면은 그것은 또 아니다.
‘한스 한젠이 사는 방식을 부러워하면서도, 이상하게도 토니오는 언제나 한스를 자신이 사는 방식 쪽으로 끌고 오려고 애를 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른이 된 그는 그 자신을 이러한 ‘예술성’에 꽁꽁 집어넣어 버린다. 완벽한 ‘주변인’이 된 것이다. 심하게는 ‘시민’들을 경멸하기에 이른다.
‘재능을 남과 어울리기 위한 장식품으로 생각하는 소인배들을 한없이 경멸했다. (…) 훌륭한 작품이란 곤궁한 삶의 압박에 시달릴 때에만 생겨나고, 생활하는 자는 창작할 수 없으며 완전한 창작자가 되려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서 행복하고 근사하게 예술가처럼 살겠다고 작정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행을 통해 ‘예술’과 ‘시민’의 ‘화해’점을 찾게 된다. 화해의 시작은 배 위에서 만난 한 청년이었다. 이 청년은 ‘예술’과 ‘시민’ 스펙트럼의 중간에 위치하는 사람이다. 처음에 토니오 크뢰거는 ‘이 자는 문학의 <문> 자도 모르는 자군!’이라 생각하지만 곧 청년의 ‘시민성’ 안에 있는 ‘예술성’을 발견하고 그의 말에 귀 기울이게 된다.
‘토니오 크뢰거는 이 청년에게 은밀한 호감을 느끼며 싹싹하면서도 어리석은 이 모든 말에 귀를 기울였다. (…) 이 젊은이는 틀림없이 시를 쓸 거야, 깊이 진실하게 느낀 상인의 시를, 하고 토니오 크뢰거는 생각했다.’
‘화해’의 정점은 어렸을 적의 동경 대상, 한스 한젠과 잉에보르크 홀름을 만났을 때 나타난다. 그들은 각 세계의 극단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과 다시 만나면서, 그는 자신은 결코 그들처럼 될 수 없음을, 두 세계는 완전한 평행 세계임을 확실히 알게 된다. 그는 그 깨달음을 ‘어떤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잘못된 길을 걷는 까닭은 이들에겐 올바른 길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들과 다른 자신의 예술 기질을 그 자체로 인정하게 되고,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다른 한 쪽을 의식하느라 한 쪽으로 자신을 몰아가고 가둬놓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인위적으로 차가운 흥분 상태를 만들어 기진맥진해진 자기 자신, 그리고 길을 잘못 들고 황폐해지고, 번민하느라 병들어 버린 자기 자신을 보았다.’
이렇게 그는 모순적인 인물이다. 이런 그의 모순성을, 그의 여자친구인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는 “길을 잃고 헤매는 시민”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사실 그는 사실 출생부터가 모순적이다. 그에게는 지극히 ‘시민’적인 아버지의 피와 ‘예술’적인 어머니의 피가 동시에 흐르고 있다. 그는 시민에 속해있지 않지만, 시민이다. 시민을 동경하지만, 동시에 혐오한다. 그 사실은 평생에 걸쳐 그를 주변인으로서, 회색 인간으로서 외롭게 했지만, 동시에 그의 정체성이 된다. ‘난 두 세계 사이에 서 있어서, 어느 세계에도 안주할 수 없습니다.’ 리자베타에게 보낸 편지에 쓴 말처럼, 저 말 자체가 토니오 크뢰거를 설명하는 말이다. 평생을 두 세계 사이에서 갈등하고 산 토니오 크뢰거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한낱 문사를 작가로 만들어 주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적인 것, 생동하는 것, 평범한 것에 대한 나의 이 시민적인 사랑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자신이 ‘주변인’이나 ‘회색 인간’이 아닐까 하고 느낀 적이 있지 않을까? <토니오 크뢰거>는 그들을 위한 책이다. 이들은 특성상 자신이 될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을 동경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사랑하게 된다. 그 중 누군가는 그들이 될 수 없음에 절망하고 자신을 극단으로 가둬놓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 쪽 세계에 머물면서 다른 세계를 동경하는 것 자체가 ‘주변인’과 ‘회색 인간’의 운명이다. 그것은 괴로운 일이 아니다. 그냥 그대로 그런 것이다. 오히려 서로 다른 세계를 살면서 상대편의 존재 의미를 부각시켜주는 것이 바로 그들의 역할인 듯하다. 그렇게 서로 다른 세계의 존재를 동경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헛되어 보일지라도,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토니오 크뢰거>는 말해준다.
‘리자베타, 나의 이러한 사랑을 꾸짖지 마십시오! 그것은 결실을 맺는 유익한 사랑입니다. 그 속에는 그리움이 들어 있고, 그리고 우울한 질투와 아주 조금의 경멸과 순결하기 짝이 없는 더없이 충만한 행복감이 들어 있거든요.’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