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스스로를 만나는 공간, 라이팅룸
대도시에 살던 나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휩쓸려 해파리처럼 둥둥 떠다녔다. 단단하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발이 닿지 않는 느낌은 나를 항상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누군가를 이리저리 따라 나에게 맞지 않는 타인의 속도와 방향으로 헤엄쳤다. 숨이 차서 폐가 터질 것 같아도 멈추면 그대로 물속으로 잠겨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멈출 수 없었다. 무한경쟁사회에서 멈춤은 곧 도태를 의미했으니까. 그런데 경쟁이 가장 치열한 서울에서 잠시 멈추고 자기 자신에게 몰입함으로써 자신만의 방향과 속도를 정할 수 있다고 말하는 공간, 「라이팅룸」을 발견했다. 다짜고짜 만나보고 싶다고 편지를 썼다. 그리고 흔쾌하게 답장을 주셨다.
‘일기로 나를 사랑하는 일’이란 슬로건으로 쓰는 사람을 위한 물건을 만드는 라잇요라이프의 대표가 만든 '글로 스스로를 만드는 공간'. 을지로에 위치해 있다. (월요일 휴무, 운영시간 2~7시) @the__writingroom
라잇(라이팅룸 대표)은 어린 나이에 인도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어린아이에게 타국은 위험하다는 판단하에 홈스테이의 환경은 엄격할 수밖에 없었다. 중2병이 시작되는 시기에 집과 학교 만을 반복해야 했고 아무것도 내 뜻대로 되지 않고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모든 감정들을 종이에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 아무것도 안된다고 하잖아요. 짜증 나죠. 감정을 말로 꺼내면 혼만 났어요. 그래서 감정들을 종이 위에 토하듯이 풀 수밖에 없었어요. 낙서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그렇게 저를 위로했어요. ”
길고 긴 유학생활을 일기 덕분에 버텨낼 수 있었다.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 다이어리가 잔뜩 쌓였다. 잠시 한국에 돌아온 적도 있었지만 일찍 시작한 해외경험으로 한국의 교육(입시)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했다. 이도저도 아닌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에 다시 유학을 떠나고 다시 혼자가 됩니다. 어릴 때부터 종이에 무엇이든 표현하고, 꾸미고, 그리던 시간의 영향이었을까. 같은 것도 남들과 다르게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고, 결과물이 주목받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라잇은 '광고홍보학과'를 전공으로 결정하고 23살에 대학교에 입학했다. 전공을 배우는 일은 즐거웠다. 기업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아이디어가 실행되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했다. 졸업 후에는 마케터로 취업을 하려고 계획도 세웠다. 하지만 졸업을 앞두고 코로나가 터졌다.
“제 인생의 암흑기였어요. 코로나 초반에는 확진자에게 낙인을 찍고 비난했잖아요. 모든 동선과 사생활이 공개되고. 그래서 아무도 안 만났더니 사람이 점점 우울해졌어요. 취업계획은 무너지고. 이대로 인생이 망할 것 같았죠.”
코로나로 인한 답답함은 취미로 시작한 다이어리 계정 덕분에 숨 쉴 수 있었다. 당시 다꾸[다이어리 꾸미기의 준말] 열풍이 불었다. 다이어리를 꾸며서 인스타에 올렸다. 꾸미는 걸 좋아했고, 단지 취미였죠. 다이어리를 꾸미는 스티커들도 하나하나 직접 만들었어요. 어느 날 스티커를 구매하고 싶다는 문의가 들어왔다. 신기했다. 처음에는 스티커 하나로 시작했는데, 점점 판매상품이 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사업의 규모가 커졌다. 기록브랜드 라잇요라이프가 만들어졌다. 당차게 사무실도 구했다. 하지만 막상 시작한 사업은 너무 어려웠다. 사업을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늘어가는 지출에 대비하여 사업규모를 어떻게 확장해야 하는지. 취미로 시작한 일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이 되었을 때 사업이 처음인 라잇대표는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취미로 시작한 일이 우연히 규모가 붙어 취업이 아닌 사업을 하게 된 거죠. 정석의 길을 걷는 친구들을 보며 힘들고, 위축되기도 했어요. 안정적인 월급을 받고, 승진하고, 투자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친구들과 비교했죠. 뜬 구름 잡는 삶을 선택한 게 아닌가. 좀 더 실속 있게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너무 불안하고 힘들었어요. 그럼에도 나는 왜 내가 만든 일을 놓지 못하는 걸까 계속 고민했어요. 아마 계속 일기를 써왔기 때문이겠죠. 내가 좋아하는 건 일기와 성찰이잖아요. 일기를 쓰면서 스스로를 위로했고, 내가 하는 일이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알게 됐거든요.”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한 마음을 종이에 토하듯이 써 내렸던, 그럼으로써 나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한 일기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일을 만들고 싶다는 자신의 마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라잇요라이프의 브랜드슬로건도 “일기로 나를 사랑하는 일”. 다시 한번 마음을 잡고 브랜드를 만들어가기로 결심했다. 기록상품을 판매하면서 종종 쓰는 것에 몰입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카페에서도, 집에서도 기록을 할 수 있지만 나 자신에게 집중하기 어려워질 때가 많았으니까. 그래서 사무실의 반을 쓰는 사람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기로 기획한다. 마음이 시끄러울 때마다 찾아갈 수 있는 어딘가, 누군가에게 자기만의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충분할 것 같았다고.
나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일기를 상품으로 제작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몰입할 수 있는 쓰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만들어진 「라이팅룸」. 라이팅룸 인스타그램 계정에는 쓰는 모습과 손님이 쓰고 가신 글들을 사진 찍어 올린다.
“옛날부터 쓰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좋은 거예요. 버스에서 할머니가 작은 노트를 꺼내서 뭘 쓰는 모습도 저에겐 아름다운 풍경 같고 낭만이었어요. 손으로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이 너무 좋아서, 그 모습을 남기고 싶은 집착이 있었어요.”
그런데 올린 사진과 글에 위로를 받았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리고 위로를 받은 분들이 라이팅룸에 방문해서 또 글을 남기고 간다. 라이팅룸에는 글을 잘 쓰고 싶어서 오는 게 아니라, 고민이 있거나, 마음이 어지러울 때 털어내기 위해 쓰러 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게 쓰인 글들은 다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타인이 쓴 글을 읽고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싶어진 사람들이 방문하는 것 같았다. 쓸 수 있는 공간을 내어드린 것 외에 자신이 한 일은 없다고. 알아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쓰고 가는데, 사람들 마음에는 보석 같은 것들이 있어서, 쓰게 만들면 좋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나온다고 했다. 공간을 열고 다가오는 손님층이 넓어졌다. 아저씨부터 군인까지. 아마도 상처받는 마음, 고민하는 마음은 인간의 근원이기 때문일까. 라이팅룸에는 타인이 쓴 글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타인의 글을 읽다 보면 나만 느끼는 감정이 아니구나, 괜찮아지겠구나, 초조하고 불안했던 마음이 괜찮아진다.
“라이팅룸을 오픈하고 ‘일’을 하면서 가진 불안함이 조금 괜찮아졌어요. 글을 쓰고, 위로를 받는 사람들을 눈으로 직접 보면서 내가 하는 일이 의미 없는 일이 아님을 느낀 후부터요. 내가 일을 할 때 중요시해야 하는 것이,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었구나 알게 된 거예요.”
주변에서 일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한다. 일로 돈을 벌고, 일을 마친 일상에서 행복을 찾으면 된다고. 그 삶도 맞다. 하지만 라잇 본인은 내가 가진 무언가를 무시하지 않고 채워나가는 느낌을 받으며 일할 때 행복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라잇은 일찍 시작한 해외유학으로, 어린 나이에 혼자만의 시간을 일기로 쓰며 보냈다. 차곡차곡 쌓아온 자신에 대한 기록 덕분에, ‘일기’와 ‘쓰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일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는 작은 조각들을 놓치지 않고 모아야 한다.
“평소 내가 시간과 돈을 어디에 쓰는지 살펴봐요. 예를 들어 유튜브에 많은 시간을 쓴다고 가정해 볼게요. 많고 많은 유튜브콘텐츠 중에 내가 클릭해서 본 콘텐츠를 그냥 재미 있어서 보는 거라고 그냥 넘기지 않아요. 내가 왜 이콘텐츠를 계속 보고 있는 건지, 자신에게 집중해서 물어보고 답해요.”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조각은 무엇일까? 우리는 인생에 큰 경험을 겪어야만, 엄청난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에, 너무 빨리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것을 포기한다. 오히려 ‘실망’을 통해 자기 자신을 알아갔다고 말했던 책,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한 문장이 생각난다. “자신에 대해 정말 잘 알고 싶은 사람은, 쉬지 말고 광신적으로 실망을 수집해야 한다. 실망스러운 경험의 수집이란 그에게 중독과 같을 것이다.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중독. 그에게는 실망이 뜨겁게 파괴하는 독이 아니라 서늘하게 긴장을 풀어주는 향유임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의 진정한 윤곽이 무엇인지 눈을 뜨게 해주는 향유.(293p, 리스본행야간열차, 파스칼메르시어, 들녘출판)” 작은 조각들에서 자기 자신을 수집하는 라잇처럼, 실망에서 자기 자신을 수집하는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프라두처럼. 사람은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만 자기 자신을 결정한다.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것부터 모아볼까.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작은 조각을 오늘 하나 꺼내봐야겠다.
세잎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