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섬
그냥 어느 날 끄적여본 흔한 원피스 덕후의 덕밍아웃이랄까
돌이켜 보면 내 정서가 가장 안정되어 있던 시기는 의외로 입시 공부에 매진했던 중3, 그리고 4수 때였다.
두 시기에 나는 짧고 사소한 방황을 마친 후 특목고와 대학이라는 단일한 목표에 집중했다. 남들이 시키는 것 이상으로 내가 공부할 것을 찾아서 했고 매일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쳇바퀴 돌리듯 반복적인 일상이었으나 권태감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일상이 단순했던 덕에 이따금씩 맛보는 소소한 일탈이 더 달콤했다. 예를 들면 아침에 등원하면 휴대폰을 제출하는 것이 원칙인 재수학원에서 자습시간에 몰래 휴대폰을 꺼내 음악을 들으며 자습을 하던 거라든지.
주변 아이들이 어느 반의 누가 어떤 과목을 잘하더라, 어떤 문제집이 좋더라 하던 수군거림에 휘둘리지 않고 내 방법대로만 잘하면 된다고 우직하게 믿었다, 입시는 경쟁이고 상대평가였는데도. 또한 내 어린 시절에 늘 그랬듯 그때도 내 심기를 거스르는 인간이 나의 생활반경에 있었지만 그들을 공부로 이길 수 있다는, 어쩌면 내가 그들보다 잘났다는 자의식이 있었다. 그리고 입시에서 내가 성공하리라는 무언의 확신이 있었다.
나는 입시라는 경주를 시작할 때 바라던 목표를 이뤘다. 그러나 짧은 허니문 기간이 지나고 나는 목표를 이루기 전보다 더 큰 불안감에 빠졌다. 목표 의식이 사라졌다. 아니, 내가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사실 나는 모든 사람이 단일한 목표를 갖고 경쟁하는 한국 사회에 신물이 나 있었다. 따라서 대학에 온 이후로는 내가 개척하는 삶을 살기를 희망했고, 나는 내가 충분히 독립적이고 능력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목표 없는 삶은 두려웠고 무기력증은 나의 약한 정신을 갉아먹었다. 마치 지도 없이 망망대해로 떠난 것처럼, 대해적 시대에 일확천금을 노리고 항해에 뛰어들었지만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지나가는 해적1처럼.
나는 항상 루피 같은 삶을 꿈꿔왔다. 루피는 지극히 무식하고 제멋대로다. 항해술을 전혀 모르는 채로 해적왕이 되겠다며 바다에 뛰어들었다. 상대방이 맘에 들면 친구로 삼고, 아니면 적으로 돌리고 팬다. 그리고 이긴다. 어떤 싸움이든 이길 자신이 있다. 그가 사람을 고르는 기준은 없다. 순전히 감으로 한다. 하지만 늘 정확하다. 그는 항해를 하며 전설의 섬 라프텔, 해적왕이 숨긴 보물 원피스가 존재하는지는 관심 없다. 그저 항해를 즐길 뿐이다. 나는 그의 그런 대담함도, 정확한 직관도, 낙천성도 없다. 하다못해 그와 딴판으로 몸도 약하다. 이번 생은 글렀다.
그런데 또 가만히 생각해 보니 루피는 아무 목표 없이 항해를 하지는 않더라. 그는 로그포스가 가리키는 다음 섬을 따라간다. 그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적, 싸움, 풍파를 온몸으로 즐긴다. 목표와 과정을 다 즐기는데 재능까지 있다. 재능충이다. 아니, 이게 아니고.
그냥 주절거리다 보니 느끼는 바가 있다. 루피처럼 살려면 그냥 다음 섬을 찾아가면 되는구나, 충실히, 즐겁게. 미리부터 멀리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난 항상 큰 그림을 먼저 그리다가 그 스케일에 질려 주저앉아 버린다. 그러나 루피는 해적왕이 되기 위해 큰 그림 따위 그리지 않는다. 그냥 다음 섬을 찾아가다 보면 새로운 모험이 기다리고, 이 모든 모험이 끝나면 자기 운명이 결정되리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 일단 다음 섬을 따라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