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웰몰츠식 성공체험; 자아를 깨워라
처가의 폭망
나는 벤츠 500E의 앞자리 최기사 옆에 앉아 있었다. 뒤에 짙은 갈색 가죽 사이트 앉아 계신 장인께서 운전수 옆좌석이 앉아 있던 나에게 물어보신다.
“박서방 요즘 자네 회산 좀 어떤가?”
나는 대답을 했다.
“괜찮습니다.”
그 얘기는 미루위 짐작해 보면 내 직장이 맘에 드냐는 질문이면서 나에게 자신의 회사도 염두에 두라는 장인의 물음이었다. 장인은 중소기업을 몇 개 하시고 있던 회장님이셨고 나는 그 당시 대기업의 잘 나는 부서의 과장이었다. 장인께서 하시는 말이 이어 가셨다.
“ 좀 잘 좀 배워봐. 다음에 좋은 일이 있을 거야.”
우리 회사를 자주 들먹이는 대화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런 질문엔 “나는 항상 잘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나는 사실 장인의 회사는 전혀 내 맘에 두지 않았다. 장인어르신 회사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대화 중에 그 속으로 장인께서 자기 회사에 나를 염두에 두고 계시는 걸 알고 있었다. 사실은 내가 장인어른의 회사보다 훨씬 큰 대기업에 다녔고 젊었던 나는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기에 별로였다. 그래도 은근한 이런 말에 기대는 아니더라도 한참 나이에 성공하고픈 젊은 청년 앞에 초이스가 있다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런 대답을 주고받은 그때에 최기사님이 급하게 죄회전을 아주 큰 원으로 하고 있었다. 500E, 벤츠 차가 큰 반원을 그리며 급하게 좌회전을 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전방에 있던 빌딩이 사라지고 그다음 빌딩으로 급작스럽게 대체되고 있어서 이 정도 빠른 속도면 차가 뒤집어지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이 될 정도이었다. 그런데 운전사와 나 사이에 있던 커피잔의 커피가 쏟아지지도, 커피잔의 커피가 약간의 미동만 있을 뿐이었다. 나는 짙은 가죽시티에 움츠려있으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참 돈이 좋긴 좋구먼.”
또 다른 시간 때에 아내가 내가 출근하려는데 내 옷을 매만지면서 동생인 영업이사한테 친절하게 잘하라는 말을 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해? 하고 물어보니까 이사한테 잘해야지 앞으로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얘기다. 이것도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지만 기분이 상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대답하지 않았지만 장인의 회사에 나를 기대주로 집어넣으려고 하고 있다 정도로 생각했다. 나쁘진 않았기에 그냥 마음의 한 끝에 새겼다.
마지막으로 아내 될 사람은 시집올 때 키를 세 개나 온 여자였다. 아내는 돈을 많이 들여서 시집을 왔다. 처갓집에서 그 귀하디 귀한 딸이 시집가신다니까 왕창 돈을 물 쓰든이 혼숫감을 준비해서 보냈다. 아내가 될 사람은 그 집에서도 그 위치가 아주 당당하고 큰소릴 제대로 치는 그런 위치였다.
이 세 가지 빗대어 보면 이런 주변의 상황이 기대하지도 않았었는데 은근하게 일련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면서 내가 똑똑하고 명확한 선을 그어야 했다. 나는 흙수저로 자란 열등감에 충만해서 덩덩거리며 잘 나가는 처가랑 쌈만 하며 살고 싶지 않고, 그렇다고 데릴사위가 되어서 허황한 부에 끌려다니는 결혼 생활도 싫었다. 그래서 그때 이런 처가 집안 때문에 횡재했다기보다
“내가 벌어 놓은 돈은 나보다 부자인 이 집안에 안 넣겠구나”
라는 타협점이 날 편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나는 처갓집의 힘을 입어 출세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 아내는 내가 벌어서 먹여 살리고 내 능력으로도 장인보다 더 큰 회살 만들 수 있다고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난 내가 싫었던 것은 내가 벌어 놓은 걸 처갓집에 대준다는 건 썩 마음에 드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 아주 잘 되었다란 안도감이 있었다. 그리도 바라던 마지막 마지노선이 하루아침에 유리컵이 바위 위에서 산산조각이 나듯이 박살이 나고 있었다.
일본에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진 그 두 개의 핵폭탄이 한 시간 간격으로 한꺼번에 터져버렸다. 나는 감당하기 어려웠는데 그 핵폭탄은 지상에서 터진 게 아니라 하늘을 공중에서 터졌기 때문에 더 힘들었다. 장인이 하는 회사는 크고 작은 소형회사까지 합쳐서 열개 정도였는데 가장 큰 회사가 미국에 스테이플에 단독으로 수출하는 회사였다. 미국 스테이플은 굉장히 큰 미국 전역의 판매망을 가지고 있었던 미국 회사에 독점으로 수출하고 있었으니 땅에 손 집고 하는 비즈니스였다. 바인더이며, 몇몇 주요 문구제품을 만드는 회사였는데 보통 수출하는 회사들은 L/C를 열고 한다. L/C라는 것은 자기 돈이 일단 들어가지 않고 L/C로 하면 그 L/C를 여는 동안에 결국 은행 빚으로 회사를 운영하는데 이런 회사는 현금확보액( 캐시플로우; cashflow)을 잘 운영해야 한다. 그런 이거를 맡았던 친구가 장인어르신의 친척이었는데 그런데 이 친구가 캐시플로우를 제대로 계산을 못했다. 친척이라고 고용한 사람들은 하나 같이 인맥으로 되어 진짜로 실력 있는 자를 제대로 고용한 적이 없던 회사였다. 그러니 이런 사달이 나는 경우에도 이 친구가 집에서 잠을 자고 아침 되어 부도난 회살 일하려나 오는 수준들이었다. 회사는 벌써 도산되었는데도 말이다.
지나서 잘해보니까 6개월 안에 두 사람이 결혼했다. 아내인 딸고 그 밑에 남자인 처남이 결혼했다. 지금은 가당치도 않았지만 그 당시 중소기업은 밑에 있는 벽돌 빼서 윗에 올리는 식이였다. 그 돈이 모두 회사 운영자금이었다. 내가 결혼 후 뒤 후에 2-3개월도 안 돼서 지금 남동생인 그 당시 영업 이사라는 처남이 결혼을 했다. 우리가 결혼을 서두르게 된 것도 나중에 알고 보니 남동생이 결혼할 여자가 이미 임신시켰던 것이었다. 그러니 혼전임신이니~ 뭐니~ 자존심 강한 가족이 주변의 가십이 될 테니까 큰 딸 서둘러 결혼하게끔 딸에게 압력을 주었던 것이었다. 밑에서 밀고 올라오니까 아내가 나를 선정했던 것이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바로 결혼을 했던 것이다 아내가 불빛에 비친 나에게 혼이 빠져서 결혼할 줄 착각하고 있었다. 참말로 착각은 니의 헛 배만 채워줬던 셈이었다. 내가 장동근처럼 잘 생겨서 결혼을 서둘렀던 것이 아니었다. 착각엔 국국경도 체면도 없었다.
해서 정신 차리고 계산해 보니까 딸과 아들 결혼식에 거의 10억씩 썼던 것이었다. 그 당시 회사에 1,000억의 자산 가치이고 실 운영가치는 500억이 있었는데 운영자산가치 4%에 들어가는 캐시플로우는 커다란 부분을 차지했다. 그런데 전 자산의 4%, 20억이 한꺼번에 100일 사이에 빠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영업이사, 처남이 가 공수표를 발행했고 발행된 수표 한 개가 펑크가 나버렸다. 내가 직접 내사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어서 그 속내를 속 속하 알 순 없지만 참으로 내가 일하던 기업에선 생각지도 못하는 일을 이 가족 친척끼리 끼리 운영하는 회사에선 대책 없는 자들이 대책 없이 운영하고 있었다. 이렇게 한 장의 어음을 막질 못하면 은행은 체납사간을 연장해 줄필요가 없었던 것이 이 회사가 회사 사냥꾼들에겐 노른자였고 현금을 만드는 사업체였다. 이러 일에 은행은 손실 볼 일이 없고, 장인회사가 수출전용회사였더라도 현 정부와 인맥이 하나도 없었던 이런 기업을 기업 사냥꾼이 그냥 놯둘리가 없었다. 주 기업이 도산을 했고 옆에 있던 작은 소기업과 매장까지 하루에 하나씩 날아갔다. 그러니 이게 어떤 일인지 한꺼번에 공중에서 핵폭탄이 11개가 터져버린 사건이었다. 그러니 여기서 처갓집 가족은 살아남을 확률은 아무 데도 없었고, 안타깝게도 거기서 옆에 있었던 이유로 나조차 생존할 수가 없었다. 특히나 회장님인 장인과 장모님은 살아남기가 쉽지 않았다. 이 회사는 친척들의 담보로 다 물려 있었다. 장인과 처남이 하는 기업이 이렇게 되고 있을 이때쯤에 나는 이들과 정 반대였다. 공겨롭게 나는 대기업을 너무 잘 다녔고 구미공단 프로젝트 과장 대리로 일했다. 프로젝트를 전반 관리했데 프로젝트가 끝난 후여서 그 어렵다던 프로젝크를 제때 끝이난 큰 공헌을 인정받아서 막 서울 연구소 발령을 받아서 과장으로 진급을 막 했었다. 무슨 일이든지 효율적으로 빨리 끝내는 장점이 있었고 이런 단기성 프로젴트는 여러 번 참여한 경험도 있었다. 일을 성공적으로 끝을 내고 극도로 심한 경쟁 속에서도 내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 많은 내 동기들 중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가장 좋게 서울로 금의환향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과장 진급과 서울 발령을 회사 동례들과 함께 회식하고 했었는데 지금 처갓집이 사달이 났다. 지금 내 위이 계신 연구소장은 나랑 거의 나이가 20년 차이가 있으니 선배였다. 그리고 부장님이 한 분 더 있었는데 소장님과 2,3살 차이였다. 그러면 연구소장 자리는 나한테 지금 보장이 되어 있었다. 이런 보장된 상황에 처갓집을 구원하겠다고 모든 걸 손에서 떨구어야 했다. 그리고 갑자기 지금 미국을 가야 했다.
왜? 왜? 왜? 미국을 가야 되냐?, 왜? 왜? 가는데… 나야 했나? , 왜? 지금이어야 하나, 이절묘한 시간에? 이 상황이 오합지졸이 되고 내 생각은 텀블링이 되는데…… 어쨌든 장인 어르신께서는 폭망 한 다음에 미국으로 가셨다. 그러니까 지금 장인의 회사는 다 풍지박살이 된 상태였고, 회사의 투자자들은 졸지에 빚쟁이로 변했고, 경찰이면 인터폴까지 가동되어 전 세계를 쥐 잡듯이 뒤지고 있을 그때에 장인은 미국에 가 계셨는데 미국에서 이 스트레스를 못 이기시고 결국 반신불구가 되셨다. 이게 지금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께선 대우그룹가 폭망한 후엔 베트남에서 그 훌륭한 책까지 집필했다지만 그와 비슷한 일이 우리 장인 어르신에도 있어지만 김우중 전 회장만큼 뱃심이 세지 못하셨던 장인 어르신은 병까지 얻고 사지를 못쓰시고 있었다. 막내로 살아와서 형이고 누이고 날 위해서 양보하는 걸 당연한 걸로 알고 살아왔던 난데 지금은 특히 장인을 위해서 살신성인을 해야 한다는 결심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내려할 결정에 후회하지도 않을 자신이 선득 나질 않았다. 내가 눈먼 심봉사를 위해서 심청이가 돼야 되는 것인데 참 어려웠다. 난 한 번도 심청이란 역할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 내가 날 아는 게 있었다. 이성적으로 가능치 않은데? 나의 감성적으로 끊지 못했다. 장인어른이 몸이 성치 않게 되었다는 것에는 내가 이성적이기만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의 아버지, 친아버지도 중풍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이성보다 이런 감정을 더 중요했었고 사람을 버리지 못했다.
내가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의 어려운 사정을 나는 외면 못했었다. 내 부모가 돌아가시면서 혼자 살아야 할 막내, 나를 염려해서 하늘이 정하여 처갓집 부모로 대치시켜 주웠다면 나는 이 혼잡한 상황을 강 건너 불 보듯이 외면만 할 수 없음을 알았다. 생각이 이쯤 되어 있을 땐 나는 이미 주사위를 루비콘 강 위로 던지고 이었다.
사람은 절대 버리지 못했다. 버리지 못하는 걸 꺾어서 바꿀 수는 없는 것이 이 사건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똑같이 장인어르신이 이렇게 당했다는 얘기를 듣고 내가 이성적으로는 절대 아닌데 히면서도 감성적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어찌 이 일은 손과실의 문제가 아님을 앎과 나의 성정이 결정을 했던 것 같다. 그 첨담 한 결정 죽을 출 알면서 들어가는 그런 기분 말이다. 이런 결정을 이성적이거나 논리적이 못 한 설명을 하고 있을 때 내 친형은 별로 말이 없었고, 그렇지만 날 끔찍이 사랑하던 친누나는 “내내 결혼을 잘못해서 동생을 미국으로 뺏겠네”라고 얘기만 했다.
어느 정도 맘먹고 미국에 들어왔다지만 들어와서 폭망 한 그 상황을 보고 또 놀랐다. 생각보다 더 참혹했다. 지금도 회상해 본다. 왜 그날, 놀랐던 그날로 돌아오지 못한 이유가 뭐였을까를 생각해 본다. 깨달은 것이 있었다. 물론 새로 만나 사는 결혼이나 헤어지는 회식자리는 너무 성대하면 비가역 하기가 힘들다는 걸 알았다. 갈 때 너무 크게 회식하고 너무 잘난 척 해대고 떠나면 돌아오기 힘들다는 걸 알았다. 나는 연구소에서 앞이 창창한 사원으로 초고속 진급을 했고, 그다음에 내가 유일하게 그때 석사 학위가 있었다. 그러니 그다음에 보장은 연구소장인데 그 자릴에서 포기하고 올 때 내 동기들은 나를 굉장히 축하해 줬다. 왜냐하면 나 때문에 그 친구들이 찬스가 생겼으니까 그런데 얼마나 축제를 하고 난리를 쳤는데 내가 미국에 가서 보니까 장인어르신은 중풍이 걸려서 한 발을 땅에 끌면서 뉴욕 한복판 사람이 쏠려 다니는 비좁은 길거리 한구석에서 간신히 서서 좌판장사. 페들러를 하고 있다. 상황이 이런 힘든 상황인데 싸들고 나 혼자 돌아온다? 날 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뒷머리 벅 벅 끌어대면서 돌아온다면 나의 자존심도 말이 아니었다. 그 한창 젊었을 때 자존심이 최상일 그때의 그것을 감수할 수 있을까? 감수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학교를 2년 월반한 사람이다. 억지로 이걸 끄려 올려놯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을 때 장모님께서 이 돈을 털어서 마지막으로 비즈니스 하자했던 것이고, 그러니 그 결관 장모님이 부글부글 거리는 내 몸에 불을 질러 댄 거였다.
학교로 갈 수밖에 없었다. 왜 학교로 가야 되는지? 공부가 좋아서 간 게 아니고, 내가 할 수 있는 그때의 최선책은 그리고 남겨 있던 그 작은 터널 끝의 조그마한 빛은 학교로 가서 공부하고 제2의 찬스를 잡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살기 위해서 학업을 선택했고 이 선택엔 후회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