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신문의 사양, 그리고 편지의 미래
디지털의 물결은 많은 사양 산업을 만들었다. 종이 신문이 대표적이다. 편지는 어떤가. 둘 다 종이를 쓰니 사이좋게 내리막길을 걷게 될 것인가?
신문의 목적은 정보의 전달이다. 정보는 전달 과정에서 내용이 변하지 않아야 하며, 그것이 빠를수록, 편리할수록 좋다. 이러한 요구는 신문이 말言과 소문을 대체하게 했다. 역사는 반복되었고, 이제 같은 이유로 디지털 기사가 신문을 대체하고 있다. 편지 또한 종이를 매개체로 전해지며, 디지털 기사처럼 이메일이라는 새로운 기술도 생겼다. 그렇다면 편지도 신문처럼 이메일로 대체될까?
신문에 없는 편지의 목적 중 하나는 감정의 전달이다. 정보 전달을 위한 편지는 전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이메일과 메신저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감정을 전하는 일에서 편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현대인에게 전달의 제1 덕목은 빠른 속도와 싼 가격이지만 감정은 그것에 비례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시에 감정은 내용뿐 아니라 형식과도 깊이 얽힌다. 엽서나 편지지, 봉투, 우표, 도장 같은 물성과 보낸 이의 손 글씨 같은 특별함은 전해지는 감정에 동봉된다.
10년 뒤에도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전할 것이다. 그리고 편지가 그 일에 적합한 수단이라면 편지 산업은 오히려 성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현대 사회 흐름의 중심에 인간관계의 약화 또는 느슨해짐이 있기 때문이다. 기술은 모두가 모두에게 연결되는 청사진을 제시하며 수많은 소통 수단을 인간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개인은 고립되고 관계는 얕아지고 있다. 스치는 관계 속에 값 비싼 편지가 설 자리는 없다. 아이러니는 우리가 이 단절을 이겨내고 서로에게 더 가까워진다 한들, 편지가 더 많이 쓰일 일도 없다는 것이다. 편지는 과거 거리라는 물리적 제약을 극복하는 데 사용되었을 뿐이다. 이제는 사람 몸이 더 편하게 이동하는 시대다. 편지가 직접 만남보다 좋을 수 없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장밋빛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조류를 이기는 배는 없다. 명민한 사업가라면 편지 산업에 뛰어드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돛을 올린다면 그는 둘 중 하나로 불릴 것이다. 어리석게 무모한, 혹은 자기만의 세상에 사는.
분명 세상은 더 좋아졌다는데 이상하게 우리는 행복에서 더 멀어진 듯하다. "더 높이, 더 많이, 더 빨리! 뒤처지면 끝이야. 더, 더!" 사방에서 소리쳐대는 고함들은 고막을 찌른다. 마음은 조급함으로 가득 찬다. 떠밀리는 마음은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지고 산산이 깨진 조각은 그 날카로움으로 서로를 찌른다.
편지란 누군가의 의미를 떠올리는 시간이다. 그의 소중함을 조심스레 눌러 담는 일이다. 편지는 멀어지는 서로에게서 우리를 붙잡고, 종종 맞닿아 나란히 흐르는 시간을 만든다. 편지 속에서 나는 행복했고, 조금은 괜찮은 사람이 된 듯 하다. 오직 그와 나 단둘이 머물, 한없이 느린 시간 속에 물들,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그 다정함과 여유가 내게 왔다. 그렇기에 나는 주야장천 편지에 대해 떠들 것이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더라도 편지의 가치를 계속해서 쓸 것이다. 사람과 삶이 자신이 가치 있다 여기고 좋다 생각하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면, 나는 편지가 가치 있으며 편지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든다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