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내가 살면서 가졌던 네 번의 변곡점
(3) 아내를 만나다
이제부터 세 번째 변곡점이 등장한다.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인물이신 지금의 아내가 짠하고 나타난다. 동시에 합리적이지 않은 그 어떤 상황으로부터 회피하지 않고 스스로를 지켜내는 책임과 이를 극복하는 힘과 용기가 어떤 건지를 체험한다.
이 부분은 이해와 재미를 위해 다소 상세히 설명하겠다.
복직해서 다시 회사를 즐겁게 다닌다. 회사내 탁구 동호회에 가입해서 탁구를 즐겨 쳤다. 어느 날 동아리 회장이신 오 대리님께서 자기 지인이라고 여성 한 분을 소개시켜 주셨다. 롯데호텔 커피숍에서 만나 차를 마시고, 근처 명동 경양식 집에서 저녁까지 먹고 헤어졌다. After도 없이.
그로부터 약 2~3개월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오 대리님이 저녁 먹고 같이 어딘가 갈 데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끌려간 곳은, 아뿔싸! 다름 아닌 그때 소개팅했던 여성의 집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오 대리님은 그 여성의 6촌 오빠였고, 당시 검찰 고위직이셨던 장인어른이 도대체 어떤 놈이 내 딸을 울리는지 그 놈을 잡아 오라고 하신 거였다).
지금의 장인, 장모님이 나를 맞이하여 주셨고, 주인공 여성은 없는 상태에서 집안 내력이며 가풍 등에 관해 듣고, 나에 대해서도 물으셔서 간단히 답변하였다. 아무것도 모른 채, 늦게 직장에서 돌아온 당사자는 깜짝 놀란다. 장모님이 나폴레옹 꼬냑(내 인생 처음 먹어 봄)과 먹음직한 포도를 주셔서 아주 맛있게 먹었다. 집에 갈 때 또 같은 꼬냑을 한 병 더 주셨다.
이 꼬냑이 문제다. 장모님은 “자네가 우리 집으로 장가오면 저기 진열장의 위스키 꼬냑들은 다 자네 거네. 우리 집은 술 마시는 사람이 없으니....” 난 속으로 ‘흐흐 정말입니까? 그렇다면....’ 난 이미 반쯤 무너졌다.
이렇게 해서 본격적인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시간이 좀 지나고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사귀는 여자가 있다고 말씀드렸다. 엄마는 바로 “그 여자의 시생일을 대라”라고 하셨고, 물어봐서 알려드렸다. 며칠 후 엄마는 비장한 목소리로 “아들아,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그 여자는 절대 안 된다. 당장 끊어라. 궁합이 많이 안 좋다” 라고 하셨다.
그날부터 나는 고뇌에 빠진다. 나의 하나뿐인 엄마의 말씀을 안 들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미신 같은 궁합을 이유로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여인과 헤어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마마보이라서가 아니라, 당시 우리 집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바로 얼마 전 우리집 장남인 형이 결혼한 지 8년 만에 이혼했다. 형도 궁합에서 애도 없고 서로 맞지 않아 궁합이 안 좋다는데 형이 고집부리고, 부모님도 그때는 ‘궁합이 안 좋다지만 정말 그러겠어?’라는 마음으로 결혼을 허락하신 거였다. 거짓말 같게도 그 궁합은 사실이 되어 버렸다. 형과 형수 둘 다 건강상 이상이 없는데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고, 살면서 부부간의 불화가 심화되어 결국 이혼에 이른 것이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큰아들이 그랬는데 둘째 너까지 그럴 순 없다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다.
나의 고민은 갈수록 깊어만 갔다. 어느 한쪽도 포기할 수 없는 진퇴양난. 그러다가....그렇지! 「이에는 이, 궁합에는 궁합」이다. 서울에서 유명하다는 역술가를 찾아갔다. 그분 가라사대 “어설픈 사람들이 보면 안 좋다고 얘기할 궁합이지만, 고수가 보면 궁합이 나쁜 것은 아니란다.” 녹음을 부탁했다. 리바이벌은 없고, 엄마를 모셔오면 그대로 말씀해 주신단다. 엄마는 안 올라오셨고, 대신 내가 내려가서 전주에서 유명한 역술가, 점집 등 세 군데를 엄마랑 같이 돌았다. 엄마랑 약속, 세군데 중 한군데라도 괜찮으면 통과.... 결과는, 세 군데 모두 하나같이 똑같은 궁합을 내놨다. 첫째, 아이가 없고, 둘째 여자가 기가 쎄서 아들의 앞길을 방해하는 궁합이란다. 답이 없다. 좌절이다. 눈물이 난다. 어떡하냐?
그 친구에게는 그런 얘기 자체를 할 수가 없었다. 나는 혼자서 매일 끙끙 앓으며,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고민에 빠져 지냈다. 그런 상태로 시간이 흘러 1995년 1월이 되었다. 전년도 대입 수능시험이 끝나고 대학별로 합격자가 결정된 무렵이었다. 어느 날 출근길 지하철에서 ‘한겨레 21’ 잡지를 사서 보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그해 입시에서 경희대 한의대에 합격한 세 명의 특이한 이력을 가진 사람들이 소개되었다. 셋은 공통적으로 명문대(서울대, 연대, 고대) 출신에, 나이도 30대 중반을 넘었다. 각자 회사원, 연구원, 박사과정을 그만두고 새 삷을 위해 경희대 한의대에 늦깎이로 입학한 것이다.
나는 그 길로 바로 결심한다. ‘회사를 당장 그만두고 행시를 준비해야겠다.’ 사실 난 그즈음에 궁합 문제 말고도 고민거리가 있었다. 회사 생활은 재미있고 사람들과도 잘 지내지만, 내가 회사에서 하는 일 자체가 나에게는 전혀 의미를 주지 못했다. 명색이 사회와 국가를 부르짖던 내가, 사주나 주주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내 생계를 위해 사기업에서 평생 일을 해야 한다는 게 늘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그때 내 나이 벌써 29살이었으니, 엄두가 나지 않았었다.
“그래, 바로 지금이고, 아직도 늦지 않았어, 저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많은 나이인데도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데, 나라고 못할 것인가? 더구나 어릴 적부터 엄마가 나에게는 관운이 있다고 하시지 않았던가? 난 할 수 있어” 스스로 기운을 북돋았다.
이렇게 용기를 내어 결심하는 것에는 한가지 이유가 더 있다. 그 친구와의 궁합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결심이 서자, 나는 그길로 고향의 아버지를 찾아뵈었다. 아버지 앞에서 무릎 꿇고 이렇게 말씀드린다. “아버지, 어머니의 걱정은 이해됩니다. 제가 아버지께서 그토록 원하시던 행정고시를 보겠습니다. (참고로 아버지는 순경으로 입직하여 파출소장으로 퇴직하신 경찰 공무원이셨고, 해서 말단 공무원의 설움을 내가 대신 갚아주기를 원하심). 제가 그 여인과 사귀는 사이에서 행정고시를 합격하면, 궁합에서 얘기한 제 앞길을 막는다는 말은 틀린 게 되니, 결혼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만약에 고시에 합격하지 않으면 저도 그 여인과의 결혼을 포기하겠습니다. 아이는 결혼해 봐야 아는 거구요” 아버지는 잠깐 생각하시더니 “그래 좋다” 하셨다.
그 친구를 만나 그간의 이야기를 해준다. 그리고 “내가 합격할 때까지 기다릴지 말지는 그대가 정하세요”한다. “기다리겠다”고 한다. 난 1995년 2월 말 일자로 사직하고, 3월 1일부터 낙성대에 자취방을 얻고 책을 사고 학원에 등록해서 고시 공부를 시작한다. 배수진을 치고....
정말 내 사주의 관운이 작용한 것일까? 그해 마침 당시 내무부에서 지역인재를 발굴하여 각 지방에서 근무하는 조건으로, 기존의 행정고시와는 별도로 「지방행정고등고시」 라는 제도를 새롭게 만들어 시행했다. 그리고 나는 그해 1차 시험, 다음 해 2차 시험에 합격한다. 쑥스럽지만 행정직 전국 수석으로...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 처가에서 합격 여부에 관계 없이 결혼시키자는 의견을 내셨고, 우리 집은 당근 찬성하셨다. 결혼식 날이 합격발표 이후로 잡혔다. 1996년 11월 10일 결혼식을 전주 고향집 근처 조그만 신협 강당에서 조촐하게 치렀다. 다행히 10월 말에 합격 발표를 해서 고시 합격자 신분으로 당당히 신랑 입장 하였다. 기분 째졌다. 지금 생각해도, 믿고 기다려준 아내가 감사하다.
과정을 길게 이야기하여 독자 여러분께서 다소 지루해하셨을 거 같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세세하게 이야기 한 것이니 양해 바랍니다.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난 일행들과 보리 비빔밥 집에 가면 보리밥 대신에 쌀밥을 달라고 한다. 상황에 그대로 순응하지 않는 타입이라는 거다. 그 상황에서 최선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다.
궁합으로 비롯된 부모님과 여인 사이에서 진퇴양난, 사면초가일 때, 과연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이 최선인가?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끝에 진로를 선택하였고, 다행히 결과가 해피엔딩으로 끝이 났다. 덕분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이쁜 세 딸도 얻었으니... 더할 나위가 없지 않겠는가?(근데 잘 생각해보면, 궁합이 어느 정도는 맞는 게 아닌가 싶다. 대를 이을 아들을 못 낳았으니....)
아내 덕분에 세상살이에 용기를 얻었다. 결혼은 참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