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에서 손과 팔을 못 쓰는 것이 축구의 한계일까, 본질일까? 축구의 인기나 월드컵의 위상을 고려하면 축구에서 손과 팔을 못 쓴다고 아쉬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하다. 어쩌면 당연하다. 이러한 '한계'로 인해 선수들은 현란한 드리블과 가슴트래핑과 헤딩을 선보이며 관객을 열광시킨다. 2022년 월드컵 포르투갈전에서 박지성은 가슴트래핑으로 공을 받아 오른발에서 왼발로 이어진 슛을 성공시키며 4강 신화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손과 팔을 쓸 수 없기에 나온 명장면이었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의 참가자들은 미션 수행 과정에서 다양한 '한계'에 맞닥뜨렸다. 모든 미션에서 시간적 제한은 공통 조건이었다. 1:1 흑백 대결에서는 주재료가 각 흑백 참가자에게 특정되었고, '생선의 방' 팀대결에서는 제한된 재료 선점에 대한 신경전이 벌어졌으며, 패자부활전에서는 조리된 식품이 대부분인 편의점에서 재료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무한요리지옥' 미션은 다른 어떤 미션보다도 독보적인 난이도를 자랑했다. 30분마다 새 요리를 선보여 탈락자를 가리는 미션의 주재료가 단 한 가지, 두부였기 때문이다.
이 라운드는 제목을 '무한 요리 지옥'보다는 '두부 요리 지옥'으로 바꿔도 좋을 뻔했다. 두부는 시즌1을 통틀어 하늘에서 내려오든 땅에서 솟아나든 좌중의 시선 속에 동선을 그리며 등장한 유일한 식재료다. 안성재는 두부가 생 콩이 아니라 이미 한 번 조리 과정에서 열을 가해 단백질을 응고시킨 재료기 때문에 요리의 범위가 상당히 좁아진다는 점을 지적했다. "(참가자들이) 지옥불에 그냥 타버리겠죠"라는 안성재의 발언은 이 미션의 어려움을 압축적으로 시사한다.
이 라운드는 최종 라운드보다도 더 최종 같았다는 평을 들으며 주목받았다. 주재료가 오로지 두부라는 '한계'는 참가자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도발하는 결정적 촉매로 작용했다. 특히 '무한 요리 지옥'을 살아서 빠져나온 에드워드 리는 두부만으로 전채요리부터 디저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테크닉이 돋보이는 코스 요리를 선보이며 찬사를 받았다. '두부 블록 고추장 파스타'에서는 두부를 파르메산 치즈로 재해석하고 '켄터키 프라이드 두부'는 두부인지 닭고기인지 헷갈리게 하는 맛으로 본인이 사는 켄터키의 대표적 요리를 소환했다. 에드워드 리가 재료와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남다른 데에 안성재가 감탄한 이유다.
예술사를 훑어볼 때, 회화에서 사진, 영화로 이어지는 시각 및 영상 매체의 역사는 지각적 몰입감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19세기 초에 사진이 발명되며 이미지를 기계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19세기말 탄생한 영화는 움직이는 이미지를 선보여 시간성을 도입했다. 1920년대에 들어 유성영화의 출현으로 움직이는 이미지에 소리를 입히는 것이 가능해졌다. 더 나아가 가상현실 및 증강현실로 대표되는 실감미디어에서는 촉각적 정보를 생성하고 전송하는 것마저 부분적으로 가능해졌다. 그러나 미디어의 기술적 발전, 즉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만져지는 것을 더 생생하게 재현하는 것이 곧 예술의 '발전'으로 이어졌을까?
애니메이션 <월-E(WALL-E)>(2008)는 도입부에서 지구에 홀로 남은 폐기물 처리 로봇의 애잔한 일상을 30분 동안 대사 하나 없이 팬터마임 형식으로 담아냈다. 감독인 앤드류 스탠턴(Andrew Stanton)은 영화에 사운드가 도입되면서 스토리텔링 기술에서 얻은 것보다도 잃은 것이 많다고 보았다. 무성영화에서 사운드를 담을 수 없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고안된 창의적 연출 기법들은 <월-E>의 도입부에 아름답게 변주되어 있다. 예술은 주어진 기술적 조건과 한계를 창의적으로 뛰어넘으며 매체와 장르에 고유한 미학을 정립시켜 왔다. 미디어 기술은 발전해 온 것이 맞다. 그러나 예술은 '발전'해왔다기보다는 미디어 환경과 더불어 '변화'해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에드워드 리는 <흑백요리사>가 최종화까지 공개된 후, 한국 호텔 방 안에 만들었던 테스트용 부엌 사진을 SNS에 올렸다. 경연 중 한국에 연습할 부엌이 없어서 불리했겠다는 일각의 의견에 대해 에드워드 리는 되묻는다. "부엌이란 무엇인가?" 에드워드 리는 멋진 요리도구나 값비싼 재료보다는 열정과 사랑과 창의성이 있는 곳이 곧 부엌이라고 말했다. 도마와 칼 한 자루, 그리고 호기심만 있으면 어떤 공간이든 부엌으로 만들 수 있다며, 누구나 '각자의 부엌'에서 새롭게 도전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조촐한 부엌 사진과 기발한 두부요리 시리즈를 겹쳐 떠올리며 깨닫는다. 에드워드 리가 말한 '부엌'은 꼭 부엌일 필요조차 없다는 것을. 목수의 작업실이든 춤꾼의 연습실이든 과학자의 실험실이든, 나름의 한계와 어려움을 창의적으로 돌파하려는 의지가 실현되는 공간이라면 어디든 에드워드 리가 뜻한 '각자의 부엌'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