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대 공대 여자 사람입니다 2
그놈의 교회가 문제다. 교회에는 인서울 대학에 다니는 엄친아들이 많았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지방대학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교회에서 유난히 말을 아끼셨고 애써 침착하셨다. 그런데 내가 장학금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방언 터지듯 입을 털기 시작하셨다. 게다가 내가 총장실에서 일하게 되면서부터는 우리 딸이 졸업도 전에 대학 총장실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동네방네 자랑을 늘어놓으셨다. 마치 평생직장이라도 얻은 것처럼.
같이 근무하던 비서실 도도선생님은 성격이 화통하고 정확한 분이셨는데 졸업기일이 다가오자 잠깐 얘기하자며 방으로 부르셨다.
“희선 씨, 졸업이 얼마 안 남았는데 졸업 후 계획이라도 있어?
별다른 계획 없으면 계약직으로 전화해서 같이 일하자. 다른 부서보다 비서실 계약직은 정규직 전환될 확률이 높아. 기숙사도 계속 쓸 수 있게 해 줄게.”
교직원이라면 서울에서 여대에 다니는 교회 언니가 원하던 직장이었다.
교직원이 연차가 쌓일수록 급여도 괜찮고 안정적이라 좋은데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고민되었다.
‘남들이 좋다는 거 하는 게 맞나’
머릿속으로 상상해 봤다. 5년 뒤, 10년 뒤에도 이 자리에서 똑같이 근무하고 있을 모습을.
타지생활 4년 차. 지칠 대로 지쳐있기 충분한 시간.
금요일 오후면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주말 이틀을 꼬박 교회에 살다가 일요일 오후가 되면 어김없이 기차에 올라 학교로 돌아갔던 날들. 신입생 시절 잠시나마 만끽했던 기차의 낭만은 사라진 지 오래다. 학교는 기차역에서도 셔틀로 30분은 굽이굽이 달려야 하는 외진 곳이었고, 멀미 직전 간신히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면 캠퍼스 주변엔 몇 개의 식당, 자취방들 뿐이었다. 고생스럽게 몸을 움직여 도착한 곳에선 겨우 내 방을 찾아 들어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학생이 학교로 돌아가는 게 당연하고 편안해야 했을 대학생 시절, 마치 외딴섬에 들어가 시간을 죽여야 하는 벌을 받은 듯 무료하고 지리한 날들이 계속됐다.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 도시”
[여기서 노래가 흥얼거려 지신분은 나이 잡순 분~; 김창옥 교수님 버전]
내 고향 서울. 서울이 그리웠다. 쳇바퀴 돌 듯 지긋지긋한 학교 생활에서 벗어나 서울에 가고 싶었다.
정말이지 탁 트인 서울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싶었다.
(서울이 트이긴 뭐가 트였다는 거야. 고층 건물과 차로 그득해 꽉 막히고 세상 답답한 곳이 서울인데)
20대 청춘은 해가지는 어스름할 무렵, 고단한 퇴근시간을 기점으로 시작되는 활기찬 우리들이 시간이 살아 움직이는 서울의 풍경이 그리웠다.
열기로 충만한 환한 불빛이 반겨주는 밤거리가 그리웠다.
그리하여 그 좋다는 대학교 교직원 자리를 고사하고 졸업과 동시에 집으로 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