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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지프 Dec 02. 2024

도르마무, 거래를 하러 왔다

대혼돈의 멀티버스

개인적으로 마블 영화 시리즈를 좋아한다.

영화 속의 다양한 캐릭터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인데 얼마 전, 나는 도르마무가 되는 경험을 했다.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를 보면 주인공 닥터 스트레인지가 지구를 지키기 위해 다크 디멘전의 지배자인 도르마무와 대결을 펼친다.

도르마무는 최선을 다해 닥터 스트레인지를 공격해 보지만, 닥터 스트레인지가 설정한 시간의 무한루프에 갇혀 결국, 항복하고 지구를 떠난다.



HR과의 면담 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행동은 하고 있었다.


나는 덤덤히 나의 매니저가 전달 한 '문서'를 열고 sign을 하고 있었다.메일함을 열고, 매니저가 '문서'를 보낸 메일을 찾고, 답변을 누르고, '문서'를 첨부했다.


"Hi, xxx. 당신이 공유한 문서에 사인하고 공유합니다. 추가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thank you"


타이핑부터 발송 버튼까지 모든 과정이 자연스러웠다.

메일을 발송한 이후에도 내가 어떤 생각을 갖고 덜컥 사인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몸이 반응했을 뿐이다.


며칠 후, 일주일에 한 번씩 30분간 진행되는 매니저와의 1:1 미팅을 진행했다.


"'문서'의 내용과 관련된 보완사항이나 질문은 없나?" 매니저가 포문을 열었다.


"당신이 '문서'에 설정해 놓은 목표를 변경할 수 있는 건가요?"


"가능하지, 하지만 합리적인 대안을 함께 제시해 주길 바래"


"저는 sales 직군이 아닌데, 왜 첫 번째 목표가 sales 금액인가요?  4개의 목표가 순서대로 가중치가 있다고 판단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sales는 아니지만, 우리 조직의 funding 은 sales 조직으로부터 받고 있기 때문에 sales 활동에 기여해야 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야. 그리고, 목표 순서는 우선순위가 반영되어 있지 않아."


"작년 실적기준, 제가 담당하는 영역의 고객 실적은 우리 팀 내 다른 담당자 보다 낮은 편이 아닌데, 왜 제가 대상제가 되었나요?"


"우리가 상대평가 기준으로 너의 역량을 평가하지 않고 있아. 너에게 기대하는 건 다른 팀원보다 탁월한 것이 아니라, 네 스스로가 주어진 임무를 잘 수행하는 것이야. 내가 '문서'에도 기입했듯, 너의 동료들은 네가 전문성을 확장하고 더욱 많은 고객을 커버해 주길 원하고 있어. 그것이 네가 '전문가'로서 수행해야 할 역할이야."


"당신이 '문서'에 기입한 동료 평가 내용은 내가 작년에 받았던 영역 중 '성장 필요' 영역에 기입되었던 단 2개의 내용이야. 내용에 대한 이견은 없지만, 나는 총 13명의 동료 중에 전체평가 부분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은 것도 없을뿐더러, '성장영역'에서도 당신이 언급한 2명을 제외하면 특별한 지적 사항이 없었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너에게 기대하는 부분이 있고 네가 성장하여 이 부분을 채워주길 바라고 있어. 이 프로그램은 너의 성장을 위해 진행하는 것임을 잊지 마."


나는 항상 지금의 매니저와 미팅을 하면 무한루프에 빠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흡사, 도르마무가 된 기분이다


"도르마무, 너와 거래하러 왔다."


나는 지금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현재의 매니저와의 소통이 가장 어려웠다.

지금의 매니저는 내가 이 회사에서 3번째 함께 하는 매니저이다. 첫 매니저는 인도인, 두 번째 매니저는 미국인, 그리고 지금 매니저는 국적은 일본이지만 고등학교부터 60살이 넘는 지금까지 미국에서 생활을 하고 미국 회사만 다녔다. 내 기준에서는 검은 머리 외국인인데,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의견을 배제하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동서양의 문화가 절묘하게 섞여 있는 경험이 많은 분이기 때문에 이도류 스타일로 상황을 능숙하게 대처한다.

이도류라서 오타니처럼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하는 건가??


나는 평상시와 같은 패턴으로 또 매니저의 페이스에 말려들었다. 대화를 포기하고 매니저의 답변을 수긍하면서 미팅을 끝냈다. 사실, 수긍이 아니라 패배다. 그것도 아주 익숙한 패배.


이쯤 되면, 매니저가 능숙하게 뱉어내는 영어는 나에게 모두 똑같이 들린다.


"Dormammu,  I've come to bargain"


"더 이상 질문 없습니다. 60일의 기간 동안 성장할 수 있도록 좋은 피드백 부탁드립니다."


"OK. good luck. The clock is ticking"


그렇게 미팅을 끝낸 후, 멍하니 앉아있다가 나는 문득 깨달았다.

며칠 전, '내가 왜 아무런 생각 없이' 자동적으로 '문서'에 사인을 한 이유를


그 이유는, 내 몸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내 실력으로는 도저히 현재 매니저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그러고 보니, 내 매니저는 정말 박사(Dr.) 출신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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