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PG 게임의 재발견
첫째 아들이 글씨를 못 읽던 시절, 아이를 대신해서 닌텐도 포켓몬 게임을 해주곤 했다.
나의 임무는 글씨를 읽어주고 설명해 주고 아이의 선택을 반영해서 게임을 하는 것이었다.
고백하자면, 게임을 할 때마다 조금 고통스러웠다. 우선, 나는 점수를 빠르게 올려서 승부를 가르는 슈팅장르의 게임만 해봤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능력 강화를 하는 RPG (Role Playing Game) 장르를 좋아하지도 해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 의지대로 게임을 하지 못하고, 아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다 보니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갑자기 포켓몬 게임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최근 나의 경험이 흡사 포켓몬 게임을 하는 것 같아서이다.
포켓몬 게임은 캐릭터를 포획하고 공격 기술들을 배우면서 진화를 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최근, 나는 포켓몬 게임의 캐릭터처럼 스킬을 하나 획득한 것 같다.
올해는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힘든 일을 겪고 있는데, 여러 고민들이 꼬리를 물고 엉켜가던 중,
문득 아직 인생의 절반 밖에 살지 못했다는 게 부담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고민해 봤다.
현재 나이 40대.
지금까지는 어린 나이와 건강한 신체를 장점으로 활용해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적지 않은 나이와 하나, 둘 고장 나기 시작한 신체는 더 이상 장점이 될 수 없다.
'나는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을까?'
나는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한 인생은 무엇인가?'
답이 잘 떠오르질 않는다..
혹시,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며 주변 사람들과 즐겁게 사는 것일까..?
답이 시원치 않다. 하지만, 답을 했다 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현재 주변 사람들과 즐겁게 살고 있는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현재의 나는 주변 사람들과 즐겁게 살고 있지 않다.
올해 초부터 나는 여러 가지 고민들로 다운되어 있는 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러한 부정적인 기운들은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특히 가까운 가족들에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가족들은 나의 기분을 살피기 시작했고, 이것을 눈치챈 나는 더욱 날카롭게 행동했다.
매번 후회했지만 자책만 심해질 뿐, 전혀 개선될 기미가 안보였다.
오히려, 나 스스로도 개선할 수 있다는 자신감조차 읽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것이 편했다.
혼자 있으면 최소한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을 테니 안심이 됐다.
하지만, 혼자서만 있다 보니 무료함이 찾아왔다.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하고, 인터넷 서핑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었는데, 혼자 있는 나에게 대화 상대는 '나' 자신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나'와 대화하는 법을 모르다 보니, 대화를 시작할 수 없었다.
나는 앞서 질문했던,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언인가?"에 대한 답을 할 수없었던 이유를 알게 됐다.
그동안 나는 '나'에 대한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고, 당연히 대화를 한 적도 없었다.
내 주변에 물어봐도 나에 대해 어떻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노하우에 대한 시원한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내 주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지만, 누구를 만나야 노하우를 알려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고민을 하던 중 우연히 집 앞 도서관 입구에 붙어 있는 포스터의 문구를 보게 되었다.
"독서를 통해서 작가와 대화를 할 수 있다."
뭔가 실마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독서를 통해서 정말 작가와 대화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찾았던 단서들 중 가장 그럴싸했다. 어쩌면, 내가 여태껏 책을 멀리하고 독서 경험이 없어서 기대를 갖게 된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책을 읽는 연습을 시작했다. 우선 짧은 고전부터 읽어보기 시작했다.
어린 왕자, 동물농장, 노인과 바다 등. 어릴 적 학교 숙제로 읽어본 것 같기는 하나 내용이 잘 기억이 안나는 책들이었다. 같은 책을 일단 두 번씩 읽었다. 첫 번째 읽을 때는 전체적인 내용은 파악할 수 있었으나, 작가가 어떤 생각을 느끼는 것은 어려웠다. 두 번째 읽을 때가 되어서야 조금은 주인공 혹은 작가의 의도가 담긴 구절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특정 구절을 곱씹다 보면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새롭게 배우기도, 잊었던 것을 다시 떠올리기도 혹은 스스로 다른 관점에서의 생각이 떠오를 때도 있었다. 특히, 나의 생각이 느껴지는 찰나에는 이것을 놓치고 싶지 않아 짧게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짧지만, 60일간 꾸준히 하다 보니, 나만의 생각과 느낌을 알아채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회사원으로 진화하기 위한 스킬만 배웠지만
그동안 내가 슈팅게임이나 대결장르의 게임에 익숙해서, 사회생활도 남들과의 경쟁으로만 생각했던 게 아닐까? 이제는 맵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캐릭터를 강화시켜서 새로운 맵을 탐험해 나가는 RPG 게임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