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포메라니안 하얀색 강아지가 한 마리 있다. 강아지 이름은 믿음이다. 딸들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 여느 집처럼 졸라서 키우게 된 강아지이다. 처음 이름을 지을 때 하얀 구름처럼 보송보송 걸어 다니는 게 귀여워서 구름이라고 부를까, 아님 하얀 우유거품과 닮아서 라떼라고 부를까 고민했었다. 그런데 마음 한 구석에서 믿음이라고 지으라는 속삭이는 듯한 음성이 느껴졌다. 결혼 전에 이루고 싶었던 가정이 행복한 믿음의 가정이었는데 그 소망을 따라 믿음이라 이름 짓는 것도 괜찮은 듯했고 의외로 믿음아 믿음아 불러보니 입에도 잘 붙고 독특해서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믿음이는 점차 자라면서 나에게 추상적이고 개념적이기만 했던 믿음에 대해 실질적으로 가르쳐 주는 선생님이 되었다.
첫째, 믿음은 안식이다. 하루 중 대부분을 믿음이는 곳곳에 있는 자기만의 보금자리에서 자면서 보낸다. 거의 스무 시간 가까이 엎드려 쉬면서 보내는 것 같다. 그리고 믿음은 걱정과 염려로 잠을 설치지도 않는다. 그저 자기를 부를 때까지 쉬는 것이 전부이다.
둘째, 믿음은 기다림이다. 간식을 줄 때 엎드려 기다리는데 줄 때까지 기다림을 멈추지 않는다. 한없이 신뢰의 눈망울로 쳐다보면서 간절함으로 조용히 기다리는 태도에 간식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언제까지 기다리나 테스트해 볼 때도 있었는데 언제나 믿음이의 승리였다. 절대 물러서지 않고 받을 때까지 끝까지 간식에서 눈을 떼지 않고 열렬히 바라보는 통에 주려던 자가 먼저 지쳐버린다.
셋째, 믿음은 자신이 보상을 받을 것을 알고 있다. 그 신뢰는 거의 절대적이다. 단지 기다림의 문제, 시간의 문제임을 일찍 깨달은 것이다. 게임의 규칙은 간단하다. 자기의 보호자는 자신을 너무나 예뻐하고 좋아해서 잠시의 기다림의 후에는 반드시 보상을 해 줄 것을 안다. 이렇듯 기다림의 보상이 확실히 주어지기 때문에 믿음은 한편으로 소망이기도 하다.
넷째, 믿음은 결코 실망하지 않는다. 간식을 못 얻어먹었다고 해서 보호자를 원망하지도 않는다. 안돼!라는 말에는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며 물러선다. 그리고 다른 곳에 가서 그냥 쉰다. 한참 후에 다시 상황이 주어지면 발랄하게 웃는 얼굴로 언제 거절당했냐는 듯이 기대하며 쳐다본다. 때로 무척이나 좋아하는 산책을 아무리 기다려도 못 나갈 때도 있다. 날씨가 매우 궂은날은 하루 정도 건너뛰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잘 몰라도 왜 안 나가냐고 짜증을 부리거나 신경질을 내거나 화를 내지도 않는다. 그런 날은 그저 언제 산책 나갈까 보호자만 따라다닐 뿐이다. 산책 나갈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고 나서야 기다림을 멈추고 그냥 쉬러 들어간다. 안식해 버린다.
다섯째, 믿음은앞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어떤 상황이 자기에게 주어지든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보호자는 산책을 나가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날씨가 좋아지거나 상황이 괜찮다면 늦은 시간이라도 언제든 데리고 나가지만 이런 전체적인 상황을 알 수 없는 믿음이는 그저 고요한 마음으로 자신의 자리에서 한결같이 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믿음은 보호자와의 관계이다. 믿음은 서로의 관계가 어떠함을 보여주는 시금석이다.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그 보호자의 됨됨이가 어떠한지 알 수 있는 지표이다. 선하고 좋은 보호자를 경험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 보호자에 대한 믿음은 저절로 생기고 커져간다. 그리고 그 믿음에 선한 보호자는 반드시 응답한다. 크고 넘치게 응답한다. 여기에 소망이 있다. 보호자가 든든할수록 자신을 의탁하고 맡기는 것은 거의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그래서 믿음은 개념이나 이론이 아니다. 보호자와 함께 실질적으로 생활하면서 생성되는 자연스러운 마음의 산물인 것이다. 따라서 믿음에 대해 듣는 것은 별 소용이 없을 수 있다. 그냥 보호자와 함께 지내는 생활이 거의 전부이다.
지금의 나의 가정은 결혼 전에 꿈꾸었던 그리고 흔히들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의 가정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마더 테레사 수녀님은 한 번도 예수님을 믿으세요라고 말한 적이 없으시다고 한다. 아마도 믿음이란 신에 대한 각 개인의 은밀하고 실질적인 관계에 있으며 믿음은 자연스럽게 삶으로 보이는 관계의 선물임을 아셔서 그런 것이리라.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가정은 믿음이로 인해 결혼 전에 꿈꾸었던 대로 믿음의 가정으로 불리게 되었다. 나는 오늘도 믿음이처럼 모든 상황을 잠잠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안식하며 기다리고 기대하며 오늘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