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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숲 Nov 03. 2024

룸 넥스트 도어

 자연재해나 물리적 재난 질병에 의한 죽음이라도 생명은 절대적으로 신의 영역이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죽음’이라는 마지막 종착지를 향해 애써 가지만, 가는 동안 누구라도 어떤 상황이라도 ‘죽음’이라는 그 특정 목적지를 인간의 힘으로 앞당겨서는 안 된다.  이것은 보편적인 사회적 규범이다.


 영화의 주인공  '마사' 는 암 말기로 길어야 1년 짧으면 한 달을 버틸 수 있다고 진단 받았다.

전문의학은 '마사'에게 생명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할 수 있는 치료계획과 방법을 조직할 것을 끊임없이 제공한다.

그러나 의학과 사회적 규범은 질병을 겪는 사람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겪어야 하는 가혹한 경험을 너무 많이 빠뜨린다.


 ‘자살 금지’는 인간이 따라야 할 사회의 정당한 규범이며 고통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안락사’는 불법으로 간주한다.  

'마사'처럼 가혹한 질병을 맞아 절박한 삶을 살아가는 환자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안락사’는 사회의 보편적인규범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어도 되는 것인가...




 ‘마사’는 해골처럼 점점 야위어가는 외형과 삶에 대한 의욕과 생기를 스스로 전혀 불어넣지 못하는  ‘자아의 소멸’이야말로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정신적으로 생기가 남아 있을 때 외형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더 밝고 건강할 때 죽고 싶다고 생각한다.

죽음이 아름다울 수는 없지만 ‘안락사’를 선택하면 좀 더 고통 없이 편안하고 아름답게 세상을 떠날 수 있으리라 여긴다.



 인간은 혼자 와서 혼자 떠난다고 하지만,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빈 의자처럼 쓸쓸하게 죽어가는 과정은 누구나 두렵다.


 ‘마사’는 자신의 곁에서 자신의 죽어가는 과정과 죽는 순간을 지켜줄 수 있는 친구를 원했다.  

학창 시절에 친했던 친구들은 ‘마사’의 부탁을 외면하고  ‘잉그리드’는 죽어가는 ‘마사’의 간절한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할 수 없어 '마사'와 함께 하기로 어렵게 결심한다.


‘마사’와 ‘잉그리드’는 병원관계자들을 따돌리고 병원을 몰래 빠져나와  공기 좋은 장소에 뷰가 아름다운 호텔에 머무른다. ‘마사’의 죽음이 가까이  다가 오는 동안 두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대화를 마음껏 나누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죽음’의 색깔을 묻는다면

대부분 ‘암흑’과도 같은 어두컴컴한 ‘블랙’이나 공포심을 일으키는 '붉은 핏빛’ 또는  떨어져 부서질 듯 수명을 다한 낙엽처럼 ‘마른 갈색’을 연상할 것이다.


‘마사’는 화려한 ‘핑크빛’이나 레몬처럼 화사한 ‘노란색’처럼 아름답게 자신의 죽음을 맞기를 원한다.


 이상기온과 기후변화로 인해 하얀 눈이 핑크색 눈이 되어 내리고 창 밖의 아름다운 광경을 ‘마사’와 ‘잉그리드’는 눈앞에서 마주한다.

자신의 소원대로 햇병아리처럼 부드럽고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날, 마사는 레몬처럼  샛노란 을 입고 긴 의자에 누워  편안하고 화사하게 죽음을 맞는다.


 다른 친구들이 외면한 ‘마사’를  마지막까지  지켜 준 ‘잉그리드’는 오히려 범법자가 되어 '자살'을 도왔다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사랑하는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도 자신을 희생한 ‘잉그리드’는 경찰에게 ‘자살 방조죄’라는 의심을 받으며 끈질긴 취조를 받게 된다.

‘잉그리드’는 결국 변호사를 고용하여 변호하게 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나고, 가을에 어울리는 분위기 있는 음악과 함께 막이 내려왔다.




 영화관의 자리를 뜨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운 음악이 엔딩자막과 함께 한참 흘러나오는데  영화의 의미를 다시 천천히 음미하게 했다.


 죽음의 날짜를 받아 놓은 시한부 인생이라도 인간은 신의 부름에 순응하여 신성한 천명과 사회적 규범에 따라 '자연사'해야 하는 것이 법이다.  생명과 죽음이라는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사회적 규범을 위반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불법으로 규정한다.

 멀쩡한 생명을 끊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고 절대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다. 그러나 길어야 몇 개월 더 살 수 있는 죽음의 날짜를 받아 놓은 환자들에게 ‘안락사’는 그토록 잘못인가... 의문이 들었다.


 ‘마사’의 견해처럼 몰골은 해골처럼 변해가고 삶에 대한 생기가 한 올 머리카락만큼도 남아 있지 않은 ‘자아의 소멸'이야말로 진정한 죽음일텐데 산소호흡기로 생명을 연장하고 투석과 인공혈관으로 하루하루 생을 연명하는 것은 자신과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나 지인들의 마음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가...

마지막 숨이 다할때까지  ‘죽음을 앞당기지 말 것’이라는 사회가 만든 보편적인 칙령과 전문 의학체제에 따르기에는 너무 가혹하지 않는지...


 사회는 인간 개개인의 생명이 모여 둥지를 트는 곳이며 사회적 규범은 사회라는 둥지를 틀 수 있는 본질이므로 ‘인권’이라는 대의에서 인간의 생명 자체를 가치 있게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혹한 질병을 맞아 절박한 삶을 살아가는 환자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안락사’는 사회의 보편적인 규범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어도 되는 것인가...  

 물론 ‘안락사’가 합법적으로 허용되면 그것을 악용하여 곳곳에서 안락사를 통한 죽음이 일어나게 되는 상황이 많을 것이다. 그런 단점을 철저하게 대비하여 병원에서 죽음을 앞둔 환자들에게 선택권을 부여하여 허용하는 범위에서의 안락사는 고려해 볼 여지가 있을 것 같다.


 영화의 주인공 ‘마사’처럼 마지막 남은 기간만이라도 아름답게 죽어가고 싶은 개인의 인권은 지켜주었으면... 그리고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두려움도 이기고 친구 곁을 마지막까지 지켜 준 ‘잉그리드’의 마음이 너무 예쁘다. 저렇게 고귀하고 소중한 친구가 나도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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