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행 체험기
남들 해보는 건 다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그게 바로 저예요.
그렇다고
이혼도 미행도 해보고 싶진 않았다구요.
태어난지 200일이 지나
부쩍 이쁜짓을 하는 아이를 보며
내가 감히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었던 그즈음
그때부터였다.
아이 아빠의 회식이 잦아졌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늘 아이 목욕을 해주고
쌓여있는 설거지를 군말 없이 해주던 고마운 사람.
힘들지 힘들겠다 고생이다 고맙다 생각했다.
그래그래 회식도 하고 운동도 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좀 보내세요.
아빠가 행복해야 우리도 행복하지
회식이래 봐야
마음 맞는 동료 몇이 회사 앞 술집에서 모여 앉아
소주를 기울이며 서로를 위로하고 웃는 자리
라고 생각했다.
어느날부터
술에 거나하게 취해 들어오던 그 사람은
단골 술집 <여>사장의 이야기를 꺼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고
재밌는 사람이고 공통점이 많아 신기하다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나도 맞장구를 쳤고 함께 웃었고
마음을 둘 장소가 있어 다행이다 했다.
'바보같이, 순진하기는'
지금의 내가 과거의 멍청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
시간이 흘러
이혼소송이 본격화되면서
<바람>
이라는 단어가 자꾸만 내 주변을 맴돌았다.
나의 이야기를 들은 변호사도 지인들도 가족들도
모두가 단번에 '바람이다'라고 말했다.
바람을 피는 생명체들은
자신의 핸드폰에 집착을 한다 했다.
어느 날 집구석 콘센트에 몸을 웅크리고
배터리를 보충하고 있던
그 생명체의 핸드폰을 손에 쥐어 보았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그 순간
지옥 악귀의 눈빛으로
나를 향해 달려오던 그 생명체
확신했다.
세상 어느 생명체가 저런 무시무시한 눈빛을 할 수 있을까
'저런 눈을 내가 어디서 봤지?'
영화였는지 만화였는지 모르겠다.
특수효과 가득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눈빛으로
한 때 나를 사랑한다던 그 생명체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질 수 없지
<바람>의 증거를 잡으려고 미행을 계획했다.
엄마는
갑자기 비싼 롱패딩을 하나 사서 보냈다.
아빠는
날짜를 알려주면 일을 취소하겠다 한다.
'왜들 이리 유난이지.'
나는 혼자 생각했다.
"엄마, 나 그냥 <바람> 쐬고 오는 거야.
그 사이 애기나 좀 봐주면 돼."
그 생명체의 회사 1층
낮인데도 햇빛도 하나 없는 그 길 위에서
사람들을 구경했다.
딱히 특별한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춥다.'
'나 뭐하고 있지?
'놓치면 다음에 또 와야 하나?'
'잡으면...?'
해가 지고 아빠가 왔다.
아빠와 함께
사람들을 구경했다.
차가운 <바람>을 맞다 보니
코끝이 시리고 눈물이 났다.
엄마가 사준 비싼 롱패딩이 있어 다행이었다.
아빠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아빠
두부김치 좋아해?"
내가 물었다
"좋지"
아빠는 말했다
"그럼 우리 두부김치에 소주 한 잔 콜?"
아빠는 말했다
"좋지"
그날 아빠와 처음으로 단둘이
소주를 마셨다.
그래 졌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다 같은 생명체인 것은 아니더라.
나는 인간인 생명체
너는 바이러스, 세균, 아메바, 짚신벌레 같은 그냥 생명체
'그냥 지는게 낫겠다.'
그날 그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나는 생각했다.
비밀을 파헤치고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
크게 중요하지 않아 졌다.
억울했지만
지금도 억울하지만
나에게는 나를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과 행복하게 웃으며 사는 게
내가 진짜로 이기는 거 아닌가
그날부터 간직한 나의 <바람>
나를 지켜준 이 사람들과 행복하기.
그날의 나는 졌지만
오늘의 나는 여전히 이기고 있다.
2024년 12월 19일
오늘의 기록
1패 583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