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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규규 Oct 21. 2024

개인탐구생활

나는 아주 찬찬히 몸으로 부딪혀야 내가 누구인지를 실감하는 것 같은데, 그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그 시간 동안 좀더 빨리 알아차렸다면 더 나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안 해본 적은 없어서 나의 자기연민은 안타까움이 주종을 이루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게 후회의 형태로 나오기에는 뭔가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아서 그게 그냥 나이겠거니 생각하는 게 맞지 않겠는가... 생각해본다. 

내 자신이 헤테로가 아니라는 사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자각해온 사실이나 퀴어라는 범주에 대해 익숙해지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다. 

나는 내가 숨쉬는 방법조차 처음부터 다시 파악해서 스스로 터득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휴머니즘이라는 말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지를 이해하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여러분 저는 이걸 어떻게 설명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는 이야기하고 있어요. 계속해서 알려드리려고, 아니 꼭 알아도 되는 건 아니지만 그저 말을 하려고 하고 있어요. 이런 게 있다는 것 정도만이라도. 나도 잊어버리고 있어서요 계속해서. 휩쓸려가고 있어요. 겨우겨우 생각의 지점을 잡았다고 생각하면 다시 어느 순간 그것들은 어디론가 쓸려내려가고 없어요.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해요. 난 능숙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어요. 능숙한 표정을 지을 수가 없어요. 

친구가 내가 나의 상황에 대해 설명할 때 혹시 adhd같은 거 아니냐고 할 때 안심이 됐는데, 정말 내가 그런 스펙트럼에 놓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그러니까 지금 내가 어딘가 정상적이지 않은 면면이 있어서라는)때문이 아니라, 나를 자꾸 지극히 정상이라고 생각한 가운데 지금의 어떤 '부족한' 상태를 나의 잘못으로 몰고갈 필요는 없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였다. 실제 내 과실과 태만이 문제였었더라도 더 큰 문제는 나에게 너무 큰 죄책감을 몰아세웠다는 것이었다. 

퀴어는 일종의 무척추동물같은 범주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척추동물간의 차이는, 사실 차이도 어떤 일종의 유사성이 묶임에 따라 발생하는 것인데 이건 그렇게 얘기하기엔 유사성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버섯도 굳이 이분법으로 따지면 식물보다 동물에 가까운 것이고, 아메바와 문어는 어떻게 봐도 같은 유사성에 두고 판단될 수가 없다. 무척추동물이란 어디까지나 척추동물 '이외의' 것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척추동물을 정의하기 위해서 임의로 규정되었다. 그러니까 이 퀴어라는 범주도 '헤테로가 아닌'이라는 의미로서의, 지극히 헤테로 중심으로 발생한 개념이며. '퀴어끼리'라는 연대의식은 지극히 헤테로사회의 흐름에 의해, 본의와 상관 없이 그 사회에 살고 있기에 이러한 공동체의식이 형성된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성소수자라는 개념이 애초에 유사하지 않은 집단을 엮어서 만들어내는 가분류이고, 그래서 그런 개념에 거부한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무척추동물로 분류당하든 말든 그 계열의 동물들이 유유히 자신의 생태적 흐름을 따르는 것과 달리 우리는 사람이고 이 사람들의 사회에 속해 있어 일정한 방향으로 '몰린다'는 점에서는 비슷했고, 이렇게 형성되는 그런 의식과 연대는 '살기 위해서'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그 몰림의 양상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은밀하고, 미묘한 부분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오히려 퀴어란 대단히 성기고 거친 분류방식처럼 느껴진다. 나는 여전히 '이외의' 상태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개인적으로는 소외되어 있다. 그래도 한번, 아니 꽤 자주 내가 미친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다는 점은 비슷할 것 같다. 나는 돈을 벌면서 그나마 생각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다른 말로 '유예'시킨 것이기에 실상 달라진 게 없는 그 상태는 반드시 돌아오고 반복되었다. 내 글쓰기의 출발점이 여기 즈음이라는 걸 짐작한 이래로 이렇게 16년이 지난 것 같다. 

퀴어라는 개념은 그 자체의 정체화를 추구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개인으로부터 출발하기 위한 실마리를 얻기 위해 이용되는 개념이라고, 이제서야 나는 이해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런 것이 있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라는 일종의 예시같은 것이다. 내가 그 중 어디에 속하는지를 고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얘기다. 도움을 얻지만 내가 겪어온 시간, 경험으로부터 나는 스스로를 다시 구성해야 한다. 이미 구성된 것을 발견해야 한다. 지극히 정상성에 기반을 둔 인생의 과업과 사주팔자 그 어떤 것도 이런 것에 대해 얘기하지 못하는 것 같다. 많은 것들이 언급되고 있지만 제도적으로 개선된 것은 별로 없고 어떤 사람은 그 사이에 죽음을 맞이했다. 어떤 작가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계속해서 꾸준히 작업을 펼쳐나가고 있으며 그런 사람들을 예로 들어 왜 너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가? 라고 은연중 질문을 듣는 경우도- 존재하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 처한 상황과 비슷하다. 아, 나도 내가 걔랑 같은 줄 알았다고. 근데 나는 걔가 아니라는 걸 뒤늦게 알았고 나의 문제는 현재진행형이고 그 사실을 나조차도 모르고 있었다고. 퀴어라서 더 오해당했고 나도 나를 '퀴어로만' 파악했고 퀴어라서 더 개인화가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음- 오히려 개인으로서의 자각은 심지어 헤테로들이 더 빠를 수도 있어요. (심지어 이 사실조차 헤테로인 친구가 먼저 알아차렸어요) 이걸 알겠어요? 오해하지는 마세요 나는 볼멘 소리를 하는 중이 아니라 그러기엔 지금 너무 시급해요. 뭘 어떻게 도와달라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 걸 바라지도 않고 이건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서. 그냥 지금 하는 이 말들이 다 내가 그동안 하고 있었던 생각이라서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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