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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목영 Dec 03. 2024

한 점도 고마운데

  숨이 멎는 것 같다. 몸도 얼어붙는다. 심장은 터질 것 같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인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마지막 붓 칠을 한 영혼의 절규가 녹아 있는 화폭 앞에서 숨조차 못 쉬고 마주 선다. 죽음의 그림자 같은 잿빛으로 화면을 덮고 인생무상을 가을소리(秋聲)에 담아 혼신의 힘을 쏟은 절필작(絶筆作)이다. 와병에 쇠잔해가는 기력을 다독여가며 완성한 만고에 빛나는 역작이요 대작이다. 그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며칠 후 춥고 고독이 처연한 밤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실비에 젖은 단풍길에 가을 정취를 물씬 느끼며 박물관행 버스를 탔다. 박물관에 간다는 것은 신선하고 고상한 기분마저 든다. 그런데 춘천박물관에 도착하니 검은 구름, 거센 비, 찬바람이 불어쳐 마음은 음울했고 걸음은 조급해졌다. 시간이 넉넉지 않아 ‘어느 수집가의 초대’라는 이름의 전시관을 먼저 보았다. 옛 자취가 가득한 방에 들어서니 모두가 명품 명작이라 신비스럽고 경건해지기도 했다. 우울하던 마음이 금세 밝아졌다.

그러다 이방의 마지막 작품을 보는 순간 심장의 심한 고동을 스스로는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구양수의 육백 자가 넘는 시적 산문인 추성부를 단원이 화중유시(畵中有詩) 한 폭의 그림으로 그린 추성부도다. 산중서옥의 둥근 창으로 보름달을 보며 조용히 한 선비가 글을 읽고 있다. 동자가 마당에서 소리 나는 데를 알아보려고 사립문 밖을 내다본다. 나뭇잎이 음산한 바람에 마구 흔들린다. 화면 왼쪽에는 가을 정취와 인생을 노래한 추성부가 담백한 필치로 적혀있다. 죽음을 직면한 심정이라 선지 화면은 짙은 회색으로 암울한 한밤은 검은 먹빛이다. 단원이 <김생원에 보낸 편지>에는 가을로부터 여러 번 위독하여 죽을 번 했다고 했다. 몸져누운 단원은 동지를 지나 바로 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붓끝에 힘이 모자라 덧칠을 하면서 2미터가 넘는 대작을 완성했다. 죽음은 맞이해야 할 과정일 뿐 그의 예술혼과 초인적 의지는 죽음에도 굴하지 않고 화필을 휘둘렀다. 붓을 놓은 며칠 후 얼음같이 차가운 바람이 부는 길고 외로운 밤에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격한 심장의 고동을 진정시키려 나는 불상이 있는 ‘왕실과 선비의 이상향’이라는 옆방으로 잠시 피해 갔다. 해설사의 강원 춘천지역에 유독 철로 된 불상이 많은 이유를 뒤로 들으며 진정되어가는 가슴으로 출구 쪽으로 갔다. 희미한 조명 아래서 동공이 확대되는 순간 나는 사백여 년 전에 와 있는 착각에 빠져들었고 심장의 고동이 다시 격렬해졌다. 섬세하고 유연한 필치로 점하나 터럭 하나 흐트러짐이 없이 미세한 주름까지 세밀하게 그린 허목의 초상화가 아닌가. 마치 살아서 ‘가벼이 기뻐하거나 성내지 말고 반드시 공손함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화산관은 허목의 외모와 사상을 그대로 담은 듯했다. 초상화를 넘어서 그의 내면까지도 엿볼 수 있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그림이다. 

한동안 진정을 못하고 있다가 글벗(文友)과의 모임 시간에 늦을세라 흥분된 마음으로 우산조차 접고 세찬 비를 맞으며 주차장으로 달렸다. 남은 일정의 기대감조차 두 거장의 그림이 주는 감동으로 송두리째 매몰되어갔고 생각은 온통 그들의 삶과 그림 속으로 빠져들었다. 내 감정의 흐름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추성부도가 그 촉발점이요 초상화가 폭발점이라고 생각되었다. 단원의 유작은 추사의 절필작을 상기시켰다. 추사는 죽음을 예지하고 있었고 기력을 추슬러 봉원사 판전의 현판을 썼다. 병마에 시달려 육신의 필력은 예전처럼 기백이 넘치고 유려하지 못했으나  혼이 스며든 완숙하고 질박한 글씨의 판전을 남기고 사흘째 되던 비바람 불던 밤에 운명했다고 한다. 죽음을 향하여 가는 항해에서 예술은 이들의 유일한 동반자가 아니었을까. 단원과 추사가 열어놓은 새로운 예술의 문을 통하여, 이들이 남겨놓은 순미한 작품을 통해 많은 후학들이 앞다투어 대작을 완성했다. 이들은 인생의 가장 화려한 시간과 지고의 성취감을 맛보았으나 죽음에 이르러서는 외로움과 궁핍을 피하지 못했다.

죽음을 예견하면서 그 죽음과 허무를 예술로 승화시키고 암울함에도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불후의 걸작이 이런 여건에서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니 귀경길 내내 감동이 이어졌다. 죽음을 맞는 순간 과연 나는 죽음을 고향에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는 시사여귀(視死如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는지. 상실과 공포를 눈앞에 두고 태연자약할 수 있을는지. 이분들의 죽음에 임하는 자세는 나에게도 큰 도전이 되었다. 죽음은 경험될 수도 없으되 생과 사는 이어져 하나이니 죽음은 또 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여정의 시작일지 모른다. 슬픔과 허망만으로 맞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내 나이가 이분들의 생존 때 나이보다 많으니 천명을 깨닫고 삶과 죽음을 초월함으로 편안한 마음을 얻는 안심입명(安心立命)의 마음으로 받아들여야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귀경길이 지루하지 않았다. 두 대가의 처량하고 고독한 죽음이 주는 음울하고 허적하던 내 심정을 달래려고 연신 창밖을 보았으나 눅눅한 가을비만 추적추적 내려 마음은 더욱 스산했다. 

며칠 후 국립중앙박물관이 몇 점의 보물들을 순회 형식으로 춘천박물관에 잠시 전시했다는 것을 알고는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내게는 큰 행운이었다는 것에 더욱 마음이 기뻤다. 뜻밖에 대작을 만나는 횡재를 했으니 이 가을에 이보다 더 큰 대박이 어디 있으랴. 그것도 한 점도 오감한데 두 점씩이나!  



 - 오감하다 : 지나칠 정도라고 느낄 만큼 고맙다

 - 구양수 : 중국 송나라 문인

 - 추성부 : 구양수의 산문

 - 단원 : 김홍도의 호, 조선시대 화가

 - 화산관 : 이명기의 호, 조선시대 화가

 - 허목 : 조선 후기 문신, 유학자, 역사가, 정치가, 화가

 - 암울하다 : 절망적이고 침울하다, 어두컴컴하고 답답하다

 - 시사여귀(視死如歸) : 죽음을 고향에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다

 - 안심입명(安心立命) : 삶과 죽음을 초월함으로써 마음의 편안함을 얻는 것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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