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0월 13일.
하늘에서 내려다본 상하이는 쾌청한 날씨 아래 거대한 몸집을 지녔으면서도, 놀랄 만큼 한적하고 평화로운 도시처럼 보였다.
홍차오 공항은 당시 상하이 유일의 국제공항이었고, 착륙 직후 우리는 정해진 차량과 안내 직원의 인도로 신속히 숙소로 이동했다. 입국 절차는 정중하고 친절했지만, 그 안에는 형식화된 유연함과 공산 국가 특유의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거리는 아직 변화의 물결이 밀려오기 전의 고즈넉한 풍경을 간직하고 있었다. 황푸 강변의 와이탄에는 유럽 열강이 남긴 석조 건물들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지만, 그 뒤편으로는 오래된 삶의 흔적들이 이어진 골목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칙칙한 인민 복 차림의 사람들, 낡은 자전거 행렬, 그리고 시장 통에 나열된 소박한 음식들과 신선한 채소들. 아침이면 노인들이 태극권을 수련하는 모습들은 마치 흑백 사진 속에서 걸어 나온 듯, 시간의 유물 같은 풍경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물질적 풍요는 없었지만 넉넉한 인심과 삶의 여유가 묻어 있었다. 훗날 상하이가 거대한 현대 도시로 빠르게 변모할 것이라는 사실을 당시에는 예견할 수 없었지만 사람들의 눈빛에서는 변화에 대한 갈망을 느낄 수 있었다.
중국 측의 만찬은 횟수도 많았고 규모와 형식, 참석 인원 모두에서 압도적이었다. 당시 상하이 시장은 장춘원, 당 서기는 후일 국가 주석이 된 강택민 (장쩌민)이었다.
지금도 그 이름들이 중국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회의는 사전 조율과 국가 간 상호 호혜 원칙 하에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그 부담감과 긴장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때 우리나라는 아시아 조정 연맹 의장국으로서 우리는 회의를 주관해야 했으며 나는 아시아 조정연맹 집행 이사, 대한체육회 조정협회 국제이사 그리고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으로 활동했다. 중국은 3년 뒤 차기 의장국으로 선임되었었고, 그랬서일까 중국의 환대는 극진했다. 숙소는 국가 원수급 인사만 머무는 영빈관, 무장 경호원이 상주하는 경호 속에서 모든 일정이 사전 조율 되었다. 정원의 광대함과 고요함은 인상 깊었고, 곡진한 배려 속에서도 낯선 체제에 대한 긴장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당시는 한·중 수교 이전으로 중국을 철의 장막 '중공'이라 폄하했고 북한처럼 두려워했으며 적대시하던 시절이었다. 이념적 대립과 한국전의 상흔은 여전히 생생했다. 제3 국을 통한 연락이나 방문만이 가능했으며, 세계조정연맹 (FISA)의 신변 보호 아래 정부의 방문 승인을 받았다. 이때 정부는 국사편찬위원장이던 박영석 박사의 방중을 권유하여 수행원 자격으로 동행했다. 목적 이외의 활동이 엄격히 금지된 나라에서 그의 상해 임시 정부 건물을 찾는 일은 극비였다.
하루의 회의 공백을 틈타, 은밀히 현지인을 교섭해 박사와 함께 상해 임시정부 옛 청사 건물을 찾았다. 그 시절 이후 주소 체계가 두 차례나 바뀐 탓에 한참을 헤맨 후 마침내 그 건물 앞에 섰을 때 박사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닦았다. 잊히지 않는 장면이다. 상하이는 독립운동 본거지며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투척 사건은 우리 역사의 한 맥이다. 이때의 방문이 훗날 옛 청사 건물을 매입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이후 같은 또는 비슷한 이유로 수교 전 세 차례나 더 중국을 방문했다.
상하이는 역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중국을 대표하는 도시였고, 고적과 문화유산이 도처에 살아 숨 쉬는 인상 깊은 곳이었다. 1990년대를 지나며 상하이는 눈부신 속도로 현대화되었고 외자 기업들이 도시의 얼굴을 바꿔 놓았다. 그러나 그 겉모습 속에 숨은 공산주의 체제의 그림자와 통제 구조는 여전히 견고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상하이에서의 첫 발걸음은 단순한 외교 방문만이 아니라, 이념과 체제의 경계를 넘나드는 긴장과 호기심이 교차한 깊은 경험이었다. 낯섦과 경계 속에서도 나는 그 땅의 시간과 사람 그리고 역사의 결을 느꼈고, 그것은 수교 이후에도 여러 차례 중국을 다시 찾게 만든 기억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