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꼭 그렇게 참견을 하셨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학생들, 젊은 아기엄마, 아장아장 걷는 아기까지.
1층까지 내려가는 한 평 남짓한 공간에서 모두가 어색한 숨을 죽이고 있을 때, 그 적막을 깨는 건 언제나 엄마였다.
낯선 이에게 불쑥 향하는 엄마의 질문들.
교복을 입은 학생에게는,
“밥은 먹었니? 아이고, 늦은 밤에 어딜 다녀와?”라며 묻는다.
뜻밖의 개인사를 밝혀야 하는 학생의 얼굴엔 난감한 기색이 역력하다.
젊은 아기엄마에겐,
“아휴, 힘들겠네요. 그래도 그때가 제일 좋을 때에요. 아기가 제일 예쁠 때잖아.”라며 말을 붙인다. 잠 한숨 못 자 피곤한 아기 엄마는 “아.. 예.. 그렇죠.”라며 힘겹게 답한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에겐,
“오구, 오구, 우리 아기는 몇 살이에요?” 묻는다.
그러자 낯선 여성의 얼굴을 본 아기가 뿌-엥 울음을 터트린다.
그러니 나는 엄마를 단속하지 않을 수 없다.
엄마가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말을 걸기 무섭게, 나는 엄마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엄마, 가자! 이러면 민폐야” 라며 귓속말을 속삭여야 했다.
‘도대체 엄마는 집안일에, 바깥일에, 쉴 틈 없다 노래를 부르면서도 세상만사 왜 그렇게 관심이 많은 걸까?’
불만에 가까웠던 질문은 답을 찾기도 전에 잊혔다.
20년이 지났다.
엄마의 옆구리를 찌르던 사춘기 소녀도 이제 엄마가 되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질문이 다시 떠오른 것은 그날이었다.
“당신은 모르는 사람한테 어쩜 그렇게 말을 잘 걸어?” 남편이 물었다.
“내가? 그랬었나?”
“그래. 여기 동네 상점 주인들에게도, 지나가는 애들한테도 말을 걸잖아.”
아뿔싸! 난 정말 그런 엄마가 싫었는데!
답을 찾지 못하고 묵혀 둔 질문이 ‘안녕? 잘 지냈지? 이제 답을 내려봐’ 하며 인사를 해왔다.
이제 질문의 주어가 ‘엄마’에서 ‘나’로 바뀌었으니, ‘나는’으로 변명을 해본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다. 정말이다. ‘나처럼 사랑이 없는 사람도 있을까?’ 싶다. 젊은 날, 내가 사랑하거나 들여다볼 줄 아는 것 이라곤 나 자신, 남자친구, 이 세상의 모든 반려견과 반려묘들 뿐이었다. 나는 그 외의 것들엔 관심 없는 사람. 지나가는 아이의 칭얼거림은 소음이었고, 노키즈존이 생겨서 기뻐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노인의 느린 걸음은 답답하고, 안부를 묻는 이웃을 피하기 위해 길을 돌아서 다녔다. 나는 정말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나도 한 사람을 낳고 키우다 보니 달라지는 걸까?
마음이 자꾸 온 사람들에게 향한다.
늦은 밤 벤치에 앉아 집에 돌아가지 않는 학생의 표정이,
추운 겨울, 양말 없이 뛰어다니는 아이의 시린 발이,
아이 학원비를 벌기 위해 마트에서 일하는 누군가의 손이,
이른 아침부터 새벽부터 일어난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산책하는 아기 엄마의 한숨이,
자녀의 전화를 기다리며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온 세상 사람들에게 마음이 간다. ‘괜찮은가요?’라고 묻고 싶고, ‘밥은 먹었나요?’라고 묻고 싶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 거 알지? 근데,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자꾸 사랑하는 사람들이,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아지네.”
“조금 더하면 주책이야, 알지?” 남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다.
“그럼, 알지.” 맞다. 여기서 더하면, 정말 주책이다.
엄마에게 ‘이제야 당신의 마음이 이해된다.’ 말하고 싶어 카카오톡을 열었다. 그녀의 프로필 사진이 가을 단풍으로 바뀌어 있었다. 여름엔 어떤 이름 모를 꽃 사진이었는데.
그녀는 이제 나 자신을 사랑하다, 애인을 사랑하다, 내 아이를 사랑하다, 내 아이와 비슷한 아이들을 사랑하다, 온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다, 이제 계절마다 바뀌는 꽃과 나무마저 사랑하는가.
나도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면,
길가에 핀 꽃들을 지나치지 못하고 병든 나무를 보며 손을 뻗는 순간이 오려나.
나이가 든다는 건 사랑하는 것들이,
들여다볼 수 있는 것들이 점점 늘어난다는 의미인 걸까.
자꾸 늘어나는 관심이, 사랑이
낯선 이에게 말 거는 것을 부추긴다.
더하면 오지랖인걸 알지만, 주책인 것을 알지만,
다 내 자식 같고, 내 가족 같다. 이것 참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