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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비행사 Oct 31. 2024

가을, 오징어가 제철이다. 그리고 나도.

잊지 마. 늙은 내가 그리워할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가을, 오징어가 제철이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신선한 오징어를 샀다.


아이 없는 고요한 집에 가을볕이 부엌과 거실을 가득 채운다. 아이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듯 햇볕 속 먼지가 일렁이며 유유히 춤을 춘다.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 놓고 오징어를 손질한다.
굵은소금으로 박박 문질러 내장을 빼고,

몸통은 몸통끼리, 다리는 다리끼리 잘라 곧게 정리해 둔다.
 


거실에 머물던 볕이 집을 떠나면,
고된 하루를 마치고 돌아오는 남편이,
하루종일 뛰어놀아 주린 배를 붙잡고 들어오는 아이가 다시 거실의 빈자리를 채운다.
 


손질해 둔 오징어 중 일부는 버터로 볶았다.

아이의 반찬이다.

남은 오징어는 청양고추와 고추장 양념을 넣어 매콤하게 볶았다. 남편의 반찬이다.

소박하게 차려진 저녁상 앞에 온 가족이 모여 앉는다. 남편은 제철을 맞은 오징어가 정말 맛있다며, “역시 당신 음식이 최고야” 라며 웃는다. 나의 반찬이다.      



저녁을 먹으며 각자 오늘 있었던 일을 나눈다.
아이는 새로 배운 노래를 뽐낸다.

혼자였다면 10분이면 충분할 저녁 식사가 함께하니 한 시간은 훌쩍 걸린다.
 
언젠가 나도 머리가 하얗게 세고, 밥을 하기에도 힘들어진 몸으로 의자에 앉아 젊은 날을 추억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결혼 전엔 그 의자에 앉아 ‘찬란했던 내 젊음과 내가 이룬 업적들을 회상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니 열심히 살아야지. 조금 더 편한 의자에서, 더 좋은 집에서 내가 얼마나 멋지게 살아왔는지를 떠올려야지. 그랬었다.     


하지만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키우다 보니, 그런 것들은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배우고 있다.
 
상상해 본다. 그 의자에 앉아 내가 그리워할 순간들을.      



늙은 나는 의자에 앉아 눈을 감는다.

눈을 감으니 식탁에 올라온 오징어가 보인다.

엄마 음식이 최고라며 엄지를 올리던 아이의 작은 손이 잡힐 것만 같다.
일터에서 있었던 억울했거나, 즐거웠던 모든 것에 대해 쉴 새 없이 말하는 남편의 입이 보인다.

서툰 발음과 엇나간 음정으로 부르던 아이의 노래도,
아이를 보며 박수를 치던 우리도,

보드라운 아이의 볼도....


나의 모든 것, 나의 삶, 나의 전부였던 가족.



야리야리했던 몸도,

온 세상이 초록이던 청춘도 사라졌다.


이제 어디서든 ‘아기 엄마’로 불리다 보니

한때는 내 정체성이 사라진 것 같아 속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늙은 내가 의자에 앉아 떠올리고 있는 것은 오늘이었음을.     


2024년 가을, 내 삶이 제철을 맞았다.


24. 10. 30.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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