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지도교수님이 내게 '게으른 완벽주의'가 아니냐고 물었다. 질문의 형태를 띤 타당한 지적이었다. 대학원에 입학한 지 1년이 넘었지만, 이것저것 다양한 학문을 '찍먹'하고 있을 뿐 제대로 된 성과물을 보여준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예상치 못했던 것은 '완벽주의'란 말이었다. 제가요?
'게으른 완벽주의자'는 글자 그대로 완벽한 작업의 완성만을 추구하다가 주어진 일을 계속 미루는 사람들을 지칭한다고 한다. 여기서 일을 미루는 유형은 다양하게 나뉜다. 언젠가는 잘 될 거라는 비현실적인 낙관주의를 가진 사람, 마감스릴을 즐기는 사람, 그리고 가진 재량과 해내고 싶은 일에 대한 괴리감으로부터 두려움과 부담을 느끼는 사람 등등.
게으른 완벽주의-란 단어조차 처음 들었는데 모두 내 이야기 같았다. 문제는 마감스릴을 즐기고 낙천적이며 적당주의자였던 내가 언제부터 괴리감과 부담을 느꼈을까? 지적을 듣기 직전까지도 나는 멈추지 않고 즐겁게 선행 연구 탐독을 하고 있었다. 미루는 것 없이 열심히 달려왔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언제?
아, 교수님 앞에 설 때만이구나.
학부 때부터 대단하다고- 존경해 온 교수님이기에 자연스레 지도교수님으로 모셨고 닮고 싶었다. 일을 시키면 척척 해내는 믿음직한 제자로 서고 싶었다. 문제는 교수님만 바라보다 보니 나의 모든 눈이 교수님께 맞춰진 게 문제였다. 스스로의 결과물을 판가름할 때 교수님의 것을 비교 대상으로 삼았다. 나의 재량은 그대로인데 해내고 싶은 일에 대한 기준만 자꾸만 높아져가고 있었다.
압박감에 논문을 써야 할 때면 온갖 잡다한 걱정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시끄러운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하고 내 손도 그렇게 멈춰버렸다. 그런 주제에 교수님이 실망하실까 연락과 메일 하나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유능해 보이는 새 지도학생이 들어왔을 때는 경쟁심이 들기도 했다. 맙소사, 이건 꼭 짝사랑 같잖아?
친구들은 웃으며 드디어 사랑을 깨달은 것이냐며 놀려댔다. 정말로 그동안의 연애가 모두 가짜로 느껴졌다. 나 자신만큼이나 타인의 존재감이 거대하게 느껴지고, 매 순간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경험은 유쾌하지 않았다. 정신적 피로가 매우 크다 보니 나는 모르는 새 빠르게 지쳐 가고 있었다. 일반 사람들은 이런 걸 참고 매번 몹쓸 사랑을 한다고? 진짜?
최근에야 지나치게 교수님을 의식하고 있는 게 일반적이지 않다는 소견을 여러 차례 들었다. 이상하다, 대학원생이라면 무릇 지도교수님의 행보에 일희일비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