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의 상처 (1),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의 남편
나의 이야기
인사 담당자가 제일 싫어하는 자기소개서 문구가 있다고 한다. "저는 엄격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 밑에서 자라~(嚴父慈母). " 요즘에야 구닥다리 문장이 되었지만, 나는 정말로 그랬다.
나는 유독 어릴 적 기억이 흐릿하다. 몇몇 사건이 에피소드처럼 간헐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른 뚜렷한 기억이 없다. 홍길동도 아니고 재혼 가정도 아닌데 말이다. 오히려 어머니끼리 친하게 교류하던 다른 가족의 아버지를 아빠-라 부르며 따랐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가 더 곤혹스러웠을 것 같다.
옆집 아빠(?)가 살던 동네는 초등학교를 입학할 무렵에 수도권으로 이사 오면서 떠나게 되었다. 그래도 생물학적 아버지와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사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버지'를 언급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어색하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버지는 흔한 가부장제의 전형적인 가장이었다. 가정을 위해 멀리서 경제활동을 하며 주말에만 집을 찾아오곤 했다. 그래서 여느 집처럼 어머니와 애착 관계를 형성할 시간이 많았다.
그리고 나는 손위형제들과 나이 터울이 얼마 나지 않아 참 많이도 싸웠다. 호승심이 강했던 나는 형제들을 이겨먹으려고 무술 학원을 보내달라 조를 정도였다. 당연히 격해지는 싸움의 끝은 '사랑의 매'였다.
다만 여기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차이점이 있었으니, 어머니는 항상 구두 주걱으로 손바닥만 때리셨다. 싸움의 정도가 심하지 않으면 때리지 않고 손들기 벌칙만 시킬 때도 있었다. 분명한 건 각각의 체벌이 이루어지는 기준은 정해져 있었고, 납득할 수는 없어도 어머니의 '선'이 어딘지 인지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폭력의 강도가 심했다. 화가 나면 손에 잡히는 물건을 있는 대로 집어던지거나 몽둥이로 사용했다. 이동 중에 싸움이 발생하면 그 즉시 차를 멈추고 우리를 끌어내려 사람들이 보든 말든 체벌했다. 형제간의 우애를 지키지 못했다는 명분은 있었으나 그 어린 나이에도 내 행위와 그에 따른 대가가 상응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지금이야 아동학대라고 비난받을 행위지만, 중학생 때까지는 나도 아버지의 행위가 그렇게까지 심한 줄은 몰랐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존중했고, 아버지가 이성을 잃을 때에는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다. 정도는 다르지만 나 역시 완전히 떳떳한 것은 아니기에 그 시간이 지나기만을 빌었다. 자연스레 나도 가끔 일어나는 '훈육'만 아니라면, 아버지가 아주 악당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전학을 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