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열한 나에게 무운을 빈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 항상 ‘자기 패배적 사고’에 빠져있었다. 그 사고가 얼마나 무서운지 나를 자기연민에 빠뜨렸고, 이는 실제 처음으로 ‘자살 시도’까지 이어지게 했다. 한 편으로는 내 죽음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이기도 했다. ‘폭력을 멈춰. 나 당신 때문에 너무 힘들었어. 당신이 날 죽인 거야. 당신도 나처럼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아’ 실제 자살 시도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나 비행동적인 자살 사고는 이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스스로를 몇 번이나 죽였는지 모른다. 자살의 막이 내리고 나서는 점점 ‘아빠 탓’을 하기 시작했다. 애석하게도 그 탓이 내 삶의 원동력이 됨과 동시에 자신을 갉아먹는 독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가정폭력 가정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부모와 예전처럼 지내면서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없어 선택한 방법. 그건 ‘절연’이었다. 이를 통해 좀 더 객관적으로 그리고 상처받은 어린 내가 아닌 지금의 나로 부모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점점 엄마에 대한 감정과 생각은 점점 알 수가 없어졌다. 출구 없는 미로에 빠진 기분이랄까? 언제나 안타까운 사람. 내가 지켜줘야 할 사람. 불쌍한 사람. 아빠에게 붙잡힌 인질 같은 존재였는데 왜 자꾸 원망이 짙어지는 걸까?
(나) 선생님, 아빠에 대한 감정이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오히려 감사함도 발견하고 감정이 생겨나는 게 신기해요. 그런데 엄마에 대해서는 왜 자꾸 원망이 커지는지 모르겠어요.
(선) 그럴 수 있죠. 근데 처음 상담 때도 집에 다시 돌아가서 원망한다고 하셨잖아요.
(나) 음…. 이제는 그 원망은 사라졌어요. 다른 원망이에요. 원망? 아니 화에 조금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요.
(선) 무슨 일이 있었어요?
(나) 신랑이 엄마에게 영상통화를 하며 아이들을 보여주더라고요.
(선) 늘 있었던 일이었잖아요.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해 미정 씨가 신랑에게 고마워하고 있고요.
(나) 맞아요. 종종 있던 일이죠. 그런데 그날은 왜인지 갑자기 화가 나더라고요. 신랑에 대한 화는 분명 아니었어요. 그렇다고 엄마에게도 난 화도 아니었는데 그냥 기분이 불쾌하더라고요.
(선) 어떤 점이 불쾌했어요?
(나) 영상통화 하기 전에 둘째가 재롱을 피우기에 저랑 둘째랑 신나게 놀고 있었어요. 누구랑 통화하기에 시어머니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목소리가 엄마더라고요. 그 사실에 바로 제가 입을 닫고 방문 닫고 방으로 들어갔어요. 그 사실이 우스운 거예요. 분명 내가 둘째랑 깔깔거리며 웃고 있는 거 다 들었을 텐데. 엄마 목소리 들리자마자 방에 들어가 버리는 저 자신도 웃기고. 사위가 전화한다고 전화를 받고 애들을 봐? 무슨 낯으로? 저렇게 해서야 엄마가 깨우치는 바가 있겠어? 화가 나더라고요. 화가 나서 자꾸 상념에 빠지기에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1차 감정에서 끊어냈어요. 쉽지는 않았지만 성공 했어요.
(선) 성공 축하해요. 성공 사례 또 쌓았네? 그런데 미정 씨는 엄마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걸 여전히 깨우치기를 바라요?
(나) 아니요. 선택은 여전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이제는 그건 엄마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그 부분은 이해하고 받아들였어요.
(선) 그런데 왜 화가 난 것 같아요?
(나) 그냥 상처 주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선) 상처를 누구에게 주고 싶었어요?
(나) 당연히 엄마죠.
(선) 왜? 아빠도 미정 씨에게 상처를 더 많이 줬는데? 왜 아빠에게는 상처를 안 주고 싶어요?
(나) 아빠에겐 상처를 주겠다고 이 갈아 봤자 결국엔 고스란히 제게 돌아오니까요. 그래서 그런 에너지조차 쏟고 싶지 않아요.
(선) 아빠에게 쏟지 못한 에너지. 미정 씨가 말한 상처 주고 싶은 마음, 원망 이런 것들을 엄마에게 쏟아붓고 있는 건 아니고요?
(나) 아…?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상처 주겠다고 아빠에게 칼 빼 들고 휘둘러봐야 저만 상처 입어요. 그러니까 애초에 휘두르고 싶지 않아요. 결국 또 나만 아프니까. 상대방은 상처 같은 거 받지도 않을 텐데 그런데 엄마에게는 상처를 입힐 수 있을 것 같아요. 똑같이 돌려주고 싶어요. 내가 상처받은 거요. 분풀이가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선) 그러니까. 미정 씨는 늘 아빠에 대한 감정이 없다 했지만, 사실은 그 감정을 엄마에게 쏟아붓고 있는 건 아닌지 한번 생각해 봐요.
엄마에게 갖는 미안함과 동시에 나에게 느껴지는 비겁함. 내 스스로가 저열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난 이 원망을 멈출 수는 있을까? 가볍게 상담을 받고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은 그저 무겁기만 했다. 언제쯤이면 상처받은 내가 아닌 현재의 나로 당신들을 대할 수 있을까? 그런 방법이 있기는 한 걸까? 이것에 대한 현명한 타개책이 있을 거라 믿으며 이 난황 속에서도 나의 무운을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