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샀어? 달력을 꼭 돈 주고 사야겠어?
엄마의 달력 사랑은 남다르다. 시골에서 지내다가 서울에 올라오기만 하면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러 달력을 사곤 하신다. 친정집에 가면 달력이 방마다 걸려있는 것도 모자라 특별히 엄마의 눈에 높은 점수를 받은 달력은 해를 지나고도 여전히 그 자리에 걸려있다.
'대체 이건 몇 년도 달력이야?'
나도 모르게 못마땅한 듯 구시렁대고야 만다. 해마다 은행에서, 가게에서, 농약방에서, 병원에서 공짜로 주는 게 바로 달력 아닌가? 지천에 깔린 걸 왜 돈을 주고 사야만 하는가? 아깝기 그지없는데 딸내미 눈치를 봐서인지 먼저 앞서서
네 것도 하나 샀다.
선수 치기 대장. 나눠주는 달력보다는 예쁘기야 하겠지만 굳이 그럴 일인가? 반가운 기색 없이 볼멘소리로 속내를 드러내는 얄궂은 딸이기도 했다.
어김없이 정성스럽게 포장된 달력이 도착했다. 고심해서 골랐으리라. 늘 달력을 걸어놓곤 했던 벽면에 자리를 잡는데 그날따라 그림과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좋아하는 풍경 사진이 시선을 끌었던 모양.
몇 장 넘겨가며 별다를 것 없는 숫자들과 요일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걸 골똘히 바라보고 있으니, 여러 날들이 모여 한 달을 열두 개나 만들고, 또 열두 달이 모여 일 년을 만드는 게 새삼 대견해 보인다. 비슷한 자리에서 또 다른 배열을 만들며 묵묵히 나의 하루에 이름을 더해주는 나란한 숫자들.
물론 내게 내일이 허락된다는 가정 하에, 달력에 쓰인 숫자는 앞으로 내가 살아갈 날이 될 것이다.
오늘이 어떤 날이든 간에.
가령 고개를 떨군 채 빠르게 지나치고 싶은 날이거나, 비가 내 머리 위에만 쏟아지고 있는 건 아닐까, 유난히 헝클어진 날이거나, 어떤 모양으로든 하루를 넘기는 순간은 기어코 찾아온다.
오늘의 밤이 마중 나올 것이며 나는 나를 뉘이며 내일의 새 힘을 기대할지도 모른다.
또 어떤 날은, 하루의 계단에서 내려서기 싫을 만큼 근사했던 날도 있겠지. 그렇다 해도 하루를 고무줄처럼 길게 늘일 수는 없다. 내일은 뒷걸음치는 일 없이 어김없이 배달되는 법.
이런 날들이 고스란히 담긴 달력을 건네며 엄마가 내게 전한 건 분명 달력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안녕. 매일매일 다정한 인사를 건네고 픈 편지 같은 마음.
딸의 하루가 매끄럽게 꼬박꼬박 지나가길.
한 달, 일 년이 어여쁜 달력처럼 마음에 쏙 드는 날들로 가득하길.
어쩌면 내 하루를 지켜주고 싶은 엄마의 기도였을지도.
시간의 흐름을 간직하는 숫자의 골짜기에서 기웃거리기를 거듭하다 보니 연말엔 나도 달력을 선물해 볼까? 생각지도 못한 낯선 마음이 찾아온다. 당신의 한해, 하루하루가 안온하길 바라는 여러 겹의 마음을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