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도 없이 5시 30분이면 눈이 떠진다.
새로 장만한 매트리스 덕분에 말끔하게 자고 일어난다.
침대 밖으로 발을 꺼내는 순간부터 머리 속은 돌아간다.
밥통에 밥이 얼마나 남았더라.
아이들 하루종일 먹을 반찬과 간식은 있던가?
지극히 본능적이고 기계적인 생각들이 시작된다. 머리는 계속 회전하면서 세탁실로 향한다. 반나절만에 쌓이는 세탁물들이 쉰내를 풍기지 않도록 재깍재깍 돌려줘야한다. 색깔별로 종류별로 계속 세탁해내야 한다. 행여 한 타임을 쉬면 건조기로는 말릴 수 없는 빨래들이 줄줄이 밀리게 된다.
다음 코스는 재활용함과 쓰레기통이다.
유난히도 더운 여름 날씨에 쓰레기를 제때 비워내지 않으면 헛구역질을 동반하는 악취와 초파리 습격으로 불쾌지수가 하늘을 찌른다. 불쾌지수는 '엄마'인 나 하나로 족하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마치 희생의 아이콘처럼, 혹은 'AI 청소인간'처럼 그 모든 것을 혼자 해내고 있었다. 지금 언급한 것들은 집안일의 약 120분의 1정도나 되려나. 간단하게 아침 코스를 언급한 것 뿐이다. 이 모든 것과 동시에 나는 출근 준비를 해야 한다. 7시 30분에는 나가야 하니까.
그러는 동안, 나의 영원한 동반자 '남편'은 무엇을 하는지 보자.
움직이는 AI의 기척에 남편도 몸을 뒤척인다. 돌아누워 다시 잔다. 뉴스를 켜둔다.
귀가 쫑긋해지는 뉴스거리에 잠시 반응한다. 다시 잔다. 움직이는 AI가 모든 것을 마치고 마지막 단계를 남겨두면 일어난다. 얼굴은 못생겨도 머리빠지는 꼴은 못보는 내가 갈아둔 서리태 두유를 마시기 위해 일어난다. 씻는다. 촵촵 스킨을 바르고 옷을 입고 나간다.
우리 부부가 함께 한 20년 조금 못된 시간 동안 변함없이 지켜 온 아침풍경이다.
첫 아이가 이제 백일을 지난 신혼인, 띠동갑 남직원이 있다.
점심시간에 그의 통화 내용을 듣고 우리부부의 아침이 떠올랐다.
"아..나 오늘 못가. 그게 ...아...허락을 못받을거 같어."
여기서 허락이라함은 육아휴직 중인 아내가 해 주는 허락이다. 유난히 운동을 좋아하는 그 직원은 모든 운동모임에 아내의 허락하에 나간다고 했다. 아내가 취미가 없어서, 함께 있어주길 바라기 때문에 평화를 위해 그런다고.
그러고보니, 평화 추구는 같네?
손하나 까딱않던 남편에게 굳이 시비 걸고 싶지 않아 넘어간 날들이 많다.
돌아보면 결국, 평화는 남더라는 것이다.
그게 중요한 거였다며 스스로를 토닥일 수 있는 것도 지금의 여유 덕일런지......
나를 포함한 중년세대들은 요즘 세대가 자연스럽게 함께하는 집안일에 입을 다물지 못할 때가 있다. 이렇게나 자연스럽게 같이 한다고? 같은 평화라해도 평화 뒤에 찝찝함을 동반하지 말아야 한다. 땀범벅이 되는 아침이지만 가족을 위했다고 기쁨으로 승화한다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않고, 인중의 땀을 닦아내며 꺼질듯한 한숨이 지속된다면 앙금으로 남게 된다. 나에게도 많은 앙금들이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했던가. 굵직한 일들 외에는 잘 기억나질 않는다. 눈이 돌아갈 만큼 바쁘게 보내왔다는 사실 외에는 되도록 좋은 기억들만 아련한 추억으로 남았다. 나만큼이나 남편도 자기만의 앙금을 품고 있었겠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시간이 흐르면서 앙금과 앙금이 상쇄되버리고,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 같다.
세대차이라고 일반화하기엔,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도, 똑같은 부부도 없다.
훨씬 이전 세대에도 집안일을 함께하는 다정한 남편은 있었고,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남자는 왕이라 여기는 족속들이 있다.
그러니 이제는 섣불리 "요즘 세대는 다르다",
"예전엔 안 그랬다" 따위의 말은 하지 않으려 한다.
결국, 우리만의 방식으로 평화를 만들어내는 것,
그게 가족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