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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부터 Dec 21. 2024

잠시 쉬어 가세요.

물도 한 잔 마시고요.

지겨워.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작은 자극에도 짜증 폭발. 몰아치는 파도를 맨 몸으로 맞으며 달려온 지난 일 년이었다.

'이제 됐나요?' '아아니거든.'

'여기가 끝인가요? 제발요.'


간절함을 담아 턱끝까지 숨이 차게 달렸다. 하지만 도착지는 아직이다. 체력과 인내심을 시험하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더이상 견디기 힘들다. 그래, 그때가 되었구나. 이 말을 할 때가.


있잖아, 우리 그만 헤어지자. 때가 된 것 같아. 너에 대한 내 사랑의 유효기간은 딱 일 년인가 봐. 사실 시작부터 정해진 이별이었지. 그래도 미안해. 나는 너무 늙었고, 지쳤어. 너의 지나친 젊음을 감당하기에는 내가 많이 모자라.

처음 만났던 그날 기억해? 코끝이 살짝 시린 이른 봄이었잖아. 너는 반짝였고, 나는 지금보다는 조금 더 예뻤어. 적당히 살이 오른 거울 속 내 얼굴이 맘에 들었었거든. 지금은 다시 볼이 쏙 들어가 버렸지만 말이야. 너와 함께 한 시간의 댓가라고 생각해.
 
우리 참 많은 시간을 함께 했지. 월화수목금, 하루 6시간씩. 네 모든 걸 알게 됐어. 점심에 뭘 먹었는지, 어디가 아픈지까지 말이야.
그래. 우리 너무 많이 봤다. 서로 지겨워질만도 해. 너의 얼굴, 목소리가 자꾸 거슬리는 나를 돌아 봤어. 사랑이 변했다고 슬퍼하지는 말자. 단지 헤어질 때가 된 것 뿐이야.


사무실에서 허공을 보며 혼자 지껄이고 있는 나를, 옆 자리 동료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쳐다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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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애들이 꼴보기 싫어지는 걸 보니, 곧 방학인가봐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의 자식과의 로맨스 유통기한은 딱 일 년이다. 몸과 마음의 한계가 귀신같이 찾아온다. 공사 때문에 여름 방학이 없었던 적이 있다. 가을이 되자 선생님들이 연달아 대상포진에 걸렸다. 그 해 2학기,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쉬어야할 때 못 쉬었더니 일어난 난리법석이었다.


짜증이 용암처럼 몰려와도 눈을 한 번 질끔 감을 수 있는 것.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 나오려 하는 순간 입술을 꽉 깨물 수 있는 것. 짜증이 올라와 미간이 찌푸려질 때 꾹꾹 다리미질 해 억지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것. 모두 방학 덕분이다. 숨 쉬어가는 시간이 나를 지켜 준다.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모든 것이 그렇다. 일이든 관계든 말이다. 이상하게 작은 일에도 자꾸 넘어지고, 마음에 화가 불쑥 일어나지는 않은지? 마땅히 해야할 일인데도 딴지를 걸고 싶은 순간, 내 곁의 사랑하는 사람의 종알거림이 귀찮음으로 다가오는 그때. 잠시 그 자리를 떠나 보자. 숨 한 번 크게 쉬고, 물도 한 잔 마시자.


멈춰야 하는 순간을 외면하지 말자. 끝까지 잘 살기 위해 나를 위한 여백이 필요하다. 보다 적극적으로. 다리가 아프면 벤치에 앉아 잠시 쉬어야 한다. 그래야 그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으니. 방학처럼 긴 시간이 아니어도 괜찮다.


글을 쓸 때는 문단을 구분해야 한다. 문장과 문장을 잘 잇기 위해서 작은 쉼표 하나가 꼭 필요하다. 작가는 문단을 나누며 생각을 정리하고, 독자는 쉼표를 통해 작가와 대화한다. 적절한 호흡의 글은 독자를 끝까지 붙드는 힘을 가진다.

좋은 글에는 여백이 있다. 아름다운 삶에는 쉼이 있다.




문장에 쉼표를 찍듯, 삶 속에서 나만의 작은 방학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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