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체리봉봉 Dec 06. 2024

아빠가 교육에 참여하면 생기는 일

아이의 교육 앞에서 나는 늘 갈대가 된다. 엄마표를 강조하는 자녀교육 도서를 읽을 때면 나의 위치는 전지전능한 창조주로서 아이의 그 모든 것을 해결할 능력이 있는 존재로 격상된다. 이렇게 전지전능한 엄마가 아이를 내버려 두면 그 책임과 의무를 방기한 죄인으로 신분이 추락하는 것 같을 정도다. 



아이의 정서가 중요하다는 책을 읽을 때면 조심스레 창조주의 권능은 내려두고 아이의 의견을 전적으로 존중하며 공부보다는 정신 건강, 마음 건강을 우선으로 하는 엄마가 되겠다고 거듭 다짐한다. 

그동안 사교육과 공교육, 선행 학습과 현행 학습, 엄마표와 자기주도 학습을 시계추처럼 오가면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엄마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입을 뗐다. 

“레테”를 보러 가자고.




내향형 인간인 나는 엄마들과의 만남이 참 버거운 사람이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말을 거는 것도, 대화를 주도적으로 이끄는 스타일도 아니다 보니 마땅한 엄마들 모임이란 게 없다. 상위권 아이들의 공부 노하우도 학원 정보랄 것도 없고 옆집 아이가 어느 학원을 다니는 지조차 모른다. 그저 어쩌다 스멀스멀 불안감이 들 때마다 자녀교육 책만 들입다 읽는다. 늘 생각만 많은 내가 미덥지 않았던 남편은 급기야 유명 어학원의 레벨테스트까지 신청해 놓고 통보를 했다. 



남편은 앞서 아이를 키운 직장 동료나 선배를 만나 귀동냥을 하고는 집에 돌아와 나에게 얘기를 해준다. 참고로 남편은 잔소리를 하기는커녕 매사에 무심한 편이다. 집이 어질러져 있어도, 국을 며칠씩 끓여 내도 별 말이 없다. 그저 그러려니 한다. 그런 남편이 아이 교육에 있어서 만큼은 이렇게 달라지는 것이다.



박 씨를 물고 온 제비처럼 남편이 물고 온 공부비결은 학교에서 손꼽힐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고등학생, 수능을 치르고 갓 의대나 명문대에 진학한 언니 오빠들의 사교육 히스토리와 공부법이다.

이미 초등학생 때부터 유명 어학원을 다니며 영어를 마스터해서 그 이후로 영어만큼은 크게 시간을 투자하지 않아도 상위권을 유지했다는 이야기, 의대 입시 준비로 주말마다 대치동으로 논술학원을 다닌다는 이야기 등 나이대별로 사교육을 어떻게 이용하고 어디로 보내야 하는지 생생한 사교육비결을 듣고 와서 전달해 주는 것이다. 당연히 자식이 학업에 있어서 큰 성취를 이뤄냈으니 내가 그들의 부모라도 입을 가만히 다물고 있기 힘들 것이다.



예비 초5가 된 아이를 두고 남편은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학군지의 학원가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영어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한다는 언니가 다녔다는 어학원을 찾아내 레벨테스트를 신청했다. 




오늘이 그 레벨 테스트를 보는 날이다. 아이들이 교실에 들어가 두 시간 반 동안 주니어용 토플 문제지를 풀 동안 학부모들은 원장 설명회를 들었다. 

전년도 수능 문제와 학원가 근처 중학교의 중간, 기말고사 영어 시험지를 보여주며 범위가 적고 난도가 쉬운 중학교를 대비할 게 아니라 대입을 위한 영어 공부를 해야 한다고 했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아니지만 먼 미래, 아니 금방 눈앞에 다가올 대입을 위해 뭔가를 해야만 할 상황인 거다. 설명회에 참석한 학부모들의 자녀는 대개 초등학교 중학년 내지는 고학년이라는 것에 실소가 나오긴 했다. 하지만 어쩌랴. 다들 냅다 뛰기 시작하는데 나 혼자 걸을 수도 없고, 집에서 마냥 놀게 내버려 둘 수도 없으니. 



외국어 영역의 상향 평준화된 실력을 선별하기 위해 문제가 더욱 어려워지는 세태를 안타까워만 하기에는 내 아이에게도 곧 닥칠 내 일이 돼 버렸다. 

초속독, 초속해가 이뤄져야 단시간 안에 문제를 풀고 고득점을 얻을 수 있는데 그나마 한가한 초등시절에나 영어 학습에 넉넉하게 시간을 투자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설명회를 듣는 동안 마음 한편에는 시험을 보고 있는 아이에게 향했다. 시험 문제가 어려워서 한숨을 쉬고 있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시험을 끝내고 나온 아이는 생각보다 밝았다. 그새 친구도 사귀었다고 했다. 무슨 뜻인지 되물어보니 시험을 끝내고 나오면서 인사를 했다는 거였다. 인사 한마디 주고받은 게 그렇게 깊은 뜻이었는지, 초등의 인간관계는 참 단순하고 순수했다. 



토익 문제인지도 모르고 일단 풀었고, 원어민 선생님과의 스피킹 시간이 즐거웠다고 했다. 결과지를 받고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는 양호한 성적이었다. 무엇보다 스피킹과 리스닝 점수가 “베리굿”이어서 안심이 됐다. 말레이시아로 다녀온 단기 캠프가 마냥 헛되지는 않았구나 싶었다. 



남편은 아이의 시험 결과지를 받아 들고 퍽 만족스러워했다. 제트기를 타고 제트기류에서 비행을 하더니 여차하면 특목고까지 보낼 기세였다. 인터넷으로 서칭을 열심히 하더니 외고에 영어과가 폐지됐다는 걸 알고 바로 마음을 접었지만 말이다.



남편이 교육에 관심을 가지면서 본격적인 교육의 외주화가 시작됐다. 다음 주엔 수학 레테를 보러 중계동으로 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