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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롭게 Nov 08. 2024

14년 차 디자이너 미술선생님

선생님, 꿈이 뭐였어요? "미술선생님?"

미술학부 디자인학부, 미술과 디자인은 많이 다르다.


사람을 위하는 디자인 + 나를 위하는 미술
이 둘이 합쳐지면 '우리를 위한, 예술'이 된다.


미술로 입시를 보고 디자인과를 졸업해서 옷가게 사장을 하다가 부업으로

편집(시각) 디자이너가 되었다. 엄마가 되고서는 시간을 조율할 수 있는 미술선생님이 되었다.


내가 이렇게 직업을 옮기는 데에는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아마도 결혼 전에는 J였을 것이다.

대문자 J는 아니었어도 소문자 j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결혼 후 나는 p로 변하더니 대문자 P가 되었다.

(J=계획형, P=즉흥형)



바느질도 못하는데 의상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S대 의상디자인과에 지원했고 실기시험을 보러 갔다.

점수가 안되어서 떨어지겠지만 한 번쯤 도전해보고 싶었다.  

보기 좋게 떨어지고 세 번째로 지원했던 지방 대학에 가게 되었다. 학과는 제품디자인과.

제품디자인? 그게 머지? 기계 만드는 건가?

대학교에 오니 제품보다는 공예를 배우는 게 아닌가. 이걸 배워서 앞으로 뭘 하자는 거지?

목공예, 금속공예, 인테리어디자인, 섬유디자인, 직조디자인, 제품디자인... 기초디자인...

엥? 너무 짬뽕인데.. 흐음.. 그런데 재미있네? 시각디자인도 교양처럼 들을 수 있었다.


다양한 것을 접해보고 대학 4학년 학부교수님께서 무엇이 하고 싶냐고 물으셨다.

의상디자인이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의상디자인과 교수님을 연계해 주셨다.

참 감사했지만 나는 내 역량을 다 펼치지 못했다. 발품을 팔아 의상과 디자인이 함께한 졸업작품을 만들었고 옷가게 사장으로 취업했다.

내가 사장이라니 너무 신나는 일이었다. 옷도 좋고 옷을 보러 가는 것도 좋고 옷이 좋은 20대였다. 장사는 내 마음과는 달리 즐겁기만 하진 않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옷을 보는 일은 지치지 않았으나 정상가격 구매로 이어지기엔 스킬이 부족했다. 내가 맡게 된 옷가게는 친구들이 계약한 가게를 이어받아 건물폐업 전 6개월 정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 어떤 교수님의 소개로 신문사에서 광고디자이너로 투잡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각디자인 일이 시작되었다. 부업으로 시작한 시각디자인일은 생각보다 나와 잘 맞았다. 지역에서 유명하다는 디자인회사로 이직에 성공하고 나는 14년 동안 디자인 일을 하게 되었다. 큰 체력소비도 없었고 수정이 무한 반복되는 나에겐 도파민 같은 새로움의 작업이었다. 로고 제작, 지역 축제, 교육청 디자인의 포스터나 팸플릿 소식지, 선거와 관련된 책자 등을 만드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디자인은 너무 재미있었으나 일과 삶의 균형은 쉽지 않았기에 코로나라는 좋은 기회로 방과후 미술교사가 되었다. 방과 후 미술교사는 경쟁률이 직업이었다. 코로나 덕분에 이직에 성공한 셈이다.




미술시간, 아이들이 질문을 했다.

선생님은 어릴 때 꿈이 뭐였어요?

"미술선생님?" '내 꿈은 미술선생님이었네?'

대답하다가 생각이 났다.

"선생님은 꿈을 이루었네요?"

"그러네? 너희도 꿈을 이룰 수 있어!"

선생님이라는 명칭이 처음엔 부담스러웠고 좋을 영향력을 줄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다.

초등학교 때 특활활동으로 미술을 했다. 학교에서 내가 봤던 미술선생님들은 단답형이었다.

그려봐. 그려. 이게 다였다. 2분도 알려주는 꼴을 못 봤다. 스스로 그리는 시간을 가질 뿐이었다.


나는 디자인 회사에서도 알려주는 것을 좋아했다.

신입직원들을 알려주거나 상사와 상의하며 일하는 것을 즐거워했다. 프리랜서로 일하며 함께 일했던 사장님께서는 강사일을 권유하셨는데 제가 무슨 강사예요. 라며 손을 절레절레했었는데 이 일을 하고 있다니.

일과 삶의 균형을 가질 수 있게 한 감사한 직업이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목적지에 도착하듯이 그렇게 어쩌다 미술선생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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