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브런치 먼지털기
블로그에 먼지가 수북이 쌓였다.
나는 항상 열심히 글을 쓰겠다며 각오를 다졌는데 그게 몇 달 전이었다. 응, 나 또 시작한다.
그런데 브런치 작가가 된 뒤로는 오히려 더 조용해졌다.
글을 쓰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는데, 작가가 되고 나니 글을 못 쓰고 있었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러다 어제, 등대 글쓰기 모임에 다녀왔다.
아무렇지 않게 다시 써보자고, 마음 한 켠이 슬며시 열렸다.
어제는 공식적으로 두 번째 모임이었다.
나는 처음 참석했다. 첫 모임엔 아이가 아파 가지 못했으니까.
네이버 맵을 켜고 목적지를 찍고 가다보니 누군가 포장된 이재모피자를 들고 지나갔다.
혹시????
내가 가야될 건물의 위치를 확인하고 올라갔는데 부시럭부시럭하며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맞다! 방금 전 내 눈앞에서 지나가신 그분... 유니스님!?
내성적 인간인 나는 혼자 봉다리를 다 들고 계셨는데 도와드려야 된다는 생각을 못했다.(죄송해요 유니스님)
긴장된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 인사를 드렸다. 서울워크샵때 봤던 보통엄마님, 솔아님, 병밖을 나온 루기 방장님이 먼저 와 계셨다. 그리고 내 옆자리에는 아이디어가 샘솟는 유영해 작가님이 계셨다.
얼마나 많은 고민과 연구를 하셨으면 글감이 그렇게 쏟아질 수 있을까.
내 머릿속은 아직 먼지만 소복이 쌓여 있었는데.
우리는 '아무튼 남편'이라는 매거진을 만들기로 했다.
글을 두 편씩 써서 올리고, 책 한 권을 골라 함께 읽기로 했다.
사실 나는 '아무튼 엄마'를 두 편 쓰고 나서는 석 달 가까이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일상이 핑계가 되고, 시간이 벽이 되었다. 핑계와 벽 사이에 깔려 지낸 셈이다.
‘슬초 3기를 괜히 시작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슬그머니 올라왔다.
직장생활을 하려면 영어공부에 매달려야 한다는 압박이 컸다.
게다가 의도치 않은 잦은 이직으로 해마다 바뀐 직장의 약간 다른 포지션에서 일을하게 되어서 그런지
거의 1년마다 다시 시작해야 되서 일을 따라가야 된다는 압박감이 더해졌다.
우리 직장에선 대부분의 의사소통이 영어로 이루어진다.
그 안에서 나는 자꾸만 작아졌다. 그리고 팀장님이 술자리에서 나한테 영어를 못한다고 술에 취해서 폭탄처럼 말하셨다. 사실이기에 인정하고 아무렇지 않은 것 처럼 보였겠지만 사실 마음에 상처도 생겼다. 그때부터 팀장님앞에서 영어로 말하기가 이상하게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입을 떼지만 내가 말한 문장이 맞을까? 라는 못하는 내 모습에 하루에도 몇 번씩 자존감이 무너졌다. 입은 닫히고 마음은 멍해졌다. 그 와중에 글을 쓴다는 건 사치처럼 느껴졌다.
현실은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하는 나인데, 책상 앞에 앉아 글이나 쓰고 있어도 되는 걸까 싶었다.
그래서 눈앞의 ‘해야 할 일’만 붙들고 있었는데, 돌아보니 그건 내가 가장 좋아하던 걸 조용히 내려놓는 선택이기도 했다.
어제의 모임은 조용히 내게 말을 걸어왔다.
지금 다시 시작해도 괜찮다고. 그 말은 단지 글쓰기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내가 미뤄두었던 삶의 여기저기를 하나씩 다시 들여다보게 했다.
운동, 공부, 글쓰기, 독서, 아이들과의 시간, 그리고 집안일.
그동안 너무 조급했고, 너무 완벽하려 했고, 너무 자주 좌절했다. 좌절은 이쯤 되면 거의 가족 같다.
그래서 다시 정리해보기로 했다. 어제의 다짐으로, 오늘의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다시 해보려고 한다. 이번엔 조금 덜 몰아붙이고, 조금 더 웃으면서.
나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이다. 그런데 먹는 걸 참 좋아한다. 이 조합은 언제나 치열하다.
한동안은 워치 속 하트를 다 채우는 게 목표였다.
아침마다 스트레칭을 하고, 러닝에 근력운동까지 땀을 쏟았냈다.
땀을 흘린 만큼 뿌듯했지만 내가 한 노력과 결과가 결코 비례하지 않았다.
문제는 체중계가 아무 반응이 없었다는 점이다.
사무실에서 믹스커피 한 잔, 외국인 선생님이 구워온 쿠키 한 조각. 정말 딱 그 정도였는데, 내 몸은 모든 걸 꼼꼼히 기록하고 있었다.
억울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내 몸이 점점 단단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숨은 덜 차고, 걸음은 더 가벼워졌다.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말해주기로 했다.
요즘은 하루 30~50분. 바쁘면 아침저녁으로 나눠서 스텝퍼를 탄다.
식단은 채소, 단백질, 복합탄수화물 중심. 술은 최대한 멀리.
1년 이상 꾸준히 하면 언젠간 체중도 내 노력을 눈치채겠지.
나이 더 먹기전에 예쁜옷 좀 입고싶다!!!
‘김재우의 영어회화 100’을 펴들었다가 숨이 막혔다.
그래서 다시, 기초 영어회화부터 시작했다. 단어는 아는 것 같은데 문장은 자꾸 나를 배신했다.
직장에서 외국인 선생님과 차를 타고 이동할 때마다, 나는 조용한 승객같았다. 아주 조용한.
귀는 멍했고 자존감은 바닥을 기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정말 영어를 ‘못해서’ 말을 못 하는 걸까?
사실 나는 영어로 쓴 글도 있다. 원어민이 보면 틀린 문법 투성이일지 몰라도, 의사소통이 안 되는 건 아니다. 말을 못 하는 게 아니라, ‘틀릴까 봐’ 입을 쉽게 못 떼는 것이다.
어쩌면 완벽주의 탓일지도 모르겠다. 직장 동료가 한번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 사람들은 늘 틀릴까 봐 걱정해. 그건 언어를 배우면서 당연한 거야.”
아… 그동안 우리가 문법에 맞게, 교과서처럼 말해야 한다는 교육에 단체로 가스라이팅당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매일 필요한 문장을 미리 영작해보기로 했다. 날씨 이야기, 간단한 질문 하나라도 준비해보기로 했다.
혼잣말이라도 영어로 한다. 그리고 운전해서 가는 시간동안 오늘 무슨말을 할지 CHAT GPT와 대화도 해본다.그리고 글도 다시 쓰기로 했다.
블로그에는 일기를 쓰고, 그 안에서 마음이 더 머무는 부분을 골라 브런치에는 에세이로 정리한다.
글을 한국어로 쓰고, 영어로 번역하고, 그 영작을 바탕으로 대화도 시뮬레이션해본다.
이것이 나만의 투트랙 전략이다.
하나는 ‘글쓰기’, 또 하나는 ‘영어’.
서로 다른 길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
이제는 글을 쓰는 것이 곧 영어공부이고, 영어공부가 곧 나를 표현하는 도구가 된다.
내 속을 영어로 말할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하다.
아이들 공부를 봐주는 일만큼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이 또 있을까?
있다. 다이어트와 청소 루틴이 그렇다.
계획만큼은 완벽한데, 실행은 늘 내일의 나에게 미뤄진다.
이번한달만큼은 밖에서 금주하겠다는 남편이 말한다.
“각자 한 명씩 맡아서 가르치면 되지 않을까?”
말은 쉽지.
그래도 가능하다면 나는 큰아이를 맡겠다.
연산 실력은 부족하지만, 문제를 설계하는 건 조금 자신 있다.
화는 속으로 삼키고, 최대한 AI처럼 친절한 목소리로
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유도해보려 한다.
"놓지 마, 정신줄…"
정신줄 놓고 소리 지르는 계모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 또 다짐한다. 하루에 열두 번쯤.
하지만 남편이 늦게 오면 결국 두 아이를 동시에 돌봐야 한다.
엄마는 하나인데, 숙제는 둘이다.
그럴 땐 집안일은 일단 내려놓는다.
큰아이는 문제를 풀게 하고, 작은아이는 개념을 하나씩 천천히 알려준다.
일단 이게 계획인데, 현실은 종종 계획을 비웃는다.
그리고 남편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밖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업무상 필요한 자리일 수도 있고, 가끔은 환기용 도피처일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말이야, 이 시기는 정말 잠깐이야. 아이들은 금방 자란다.
그때 가서 “더 많이 함께할 걸” 하고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조금이라도 옆에 있어줘야 하지 않을까?
나는 밖에서 노는 걸 뭐라 하려는 게 아니다.
그럴 수도 있지.
근데 그 와중에 놀러 갈 시간은 있더라?
그렇다면 가족과 보내는 시간도 조금은 내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나는 좋은 걸 보면 아이들과 나누고 싶다. 그래서 함께 여행도 가고, 전시회도 간다.
솔직히 말하면, 애들 데리고 다니는거 힘들지만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행복하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몸을 닦고, 집안을 세우고, 그다음 나라를 말해야 한다고들 하잖아?
우리는 나라를 바꿀 수는 없지만 우리 집은 적어도 이 집만큼은 함께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집이 더 어렵게 느껴질 때가 많긴 하다. 국정 운영보다 살림이 더 복잡한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분명한 건 이 집은 나 혼자의 집이 아니라는 것. 우리 둘의 집이다.
고장난 가전도, 잔소리도, 식은 밥도 나 혼자만의 몫은 아니니까.
집이 엉망이 될까 봐 걱정이다. 사실, 이미 좀 엉망이다.
이젠 모든 걸 완벽히 해내려는 마음을 조금 내려놓았다.
나물 몇 가지에 국, 생선구이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건강한 한 그릇 요리로 충분히 괜찮다.
이 정도면 거의 궁중요리 수준이다.
주말엔 장을 보고 채소는 미리 손질해두고, 청소는 가족이 함께 하기로 했다.
평일엔 로봇청소기의 힘을 빌리는 수준에서만 끝내려고 한다.
그래서 오늘, 다시 시작한다. 이번엔 작심삼일이 아니라 작심 60일.
하루라도 더 버티면, 예전의 나보다 멋질 테니까. 폰을 내려놓고 책을 읽고,
운동화를 신으며 내 몸과 마음을 돌본다.
이 모든 일들이 내가 나를 잃지 않기 위해 쌓아가는 작은 돌탑이 되기를 바란다.
바람 불어도 무너지지 않게, 조금씩 천천히 쌓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