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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마샤 Oct 28. 2024

나와 달라 이해가 어려웠고, 나와 닮아 마음이 아팠다.

귀를 막고 눈을 감고, 무조건 사랑할게!

얼마 전, 드라마를 보며 피식 웃음이 났다.

"T세요? MBTI에서 T냐구요? T!"


<나의 해리에게>라는 드라마에서 여자 주인공이 쓰러졌다 깨어났는데, 상황 설명만 일목요연할 뿐 뒤늦게 비로소 괜찮은지 묻는 남자에게 귀여운 여자 주인공이 하는 대사였다.

아무래도 웃음이 났던 건, 딸아이를 향해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내 입에 맴도는 말이어서였을 것이다.


"아야!"

부엌에서 저녁준비를 하다가 손가락을 베었다. 외마디 비명에 정말 강아지 발걸음으로 다다다다 달려오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나의 아들이다. 엄마가 쓰러지기라도 한걸 본마냥 폭 안기며 세상 걱정이다. 가끔은 이런 넘치는 감정표현이 나에게 위로가 된다. 반면, 사춘기라 방문을 꽁꽁 닫아두는 나의 딸이지만, 비상한 청력으로 이 상황을 모두 감지했나 보다. 문이 천천히 열린다. 밴드 갖다 줘? 라며 츤데레 딸이 나온다. 괜찮냐는 말의 위로가 아니라 딸아이만의 최선의 위로 시그널이기에 또 가슴이 저릿하다. 그렇다. 나는 이렇게나 다른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나는 감성적인 사람이다. 정말 작은 것 하나에도 감동받고, 눈물 나는 (갱년기 아님 주의)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다. 그런 나에게는 나와 똑 닮은 아들, 나와 좀 다른 딸이 있다. 그러나 막상 나를 기준으로 닮았다, 다르다고 규정짓고 싶지는 않다. 한 스푼씩 그들만의 개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섞어서 그들을 판단하는 실수를 더는 하고 싶지 않다.(예전엔 많이 했다는 뜻) 너무 뒤섞이기 보다는 가까울 수록 살랑이는 바람이 오갈 정도의 거리를 두고 함께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요즘이다. (딸아이가 사춘기라 더 그런 생각이 드나보다.)


[눈물이 많다, 말이 많다, 섬세하다]

나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이 아이는 숱하게 들어온 말이 있다. '남자가 왜 이리 말이 많아, 남자가 뭐 그렇게 눈물이 많아.' 우리 사회에 규정되어 있는 씩씩한 남자의 잣대에서 다소 떨어져 있는 나의 아들을 보면서 양가 친척들에게 참 많은 걱정을 들었다. 거기에 섬세하기까지 해서 그냥 던져진 작은 말에도 상처받고 하교하기는 일상다반사였다.  


대문자 F엄마인 나는 때마다 마음이 시렸다.

그런 엄마가 아이의 ‘결’을 거스르지 않는다는건 크고 묵직한 결심이기에 내겐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아이 그대로의 모습을 보듬어주는 것으로 엄마 역할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이기도. 아이의 섬세함은 엄마를 복잡하고 예민하게 만들기 일쑤였지만 그 섬세함은 귀하디 귀한 장점이 되기도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아이는 타인의 작은 변화도 바로 알아채고, 상대방의 필요가 무엇인지 눈치채는 섬세한 눈을 가졌기에 아이의 이런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오롯이 내 몫이었다.


반면, 이런 남동생을 둔 누나는 글 초반에 이야기한 대로 T다. 이성적이라는 이야기이다. 2 엑스라지 T정도 되어 보인다. 혼날 때도 눈물이 없다. 혼나는 이유와 요점이 궁금한 눈빛이다. 그 눈빛을 잠시 숙여야 혼나는 것도 끝날 텐데.. 참 어렵다. 늘 효율을 따져댄다. 그냥저냥이 없다. 드라마를 즐겨보는 나를 이해 못 한다. 뉴스가 제일 재밌단다. 치.. 딸 키우는 맛이라는 데, 나와 큰 공감의 카테고리가 드물다. 어라? 쓰고 보니 딸아이를 이해 못 하는 나쁜 엄마처럼 보인다. 그래도 딸아이가 나에 대해 어떻게 느낄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아이에게 받는 위로와 기쁨은 예상치 못하게 느닷없이 다가오기에 더 훅하고 마음을 파고드는 감동이 있다.


성격이 다른 아이들을 키우느라 힘드시겠어요! 혹은, 딸이 끼리끼리 잘 어울리는 성향이 아니라 속상하시겠어요! 아들은 언제 큰데요, 또 울었네! 라며 걱정 어린 말들을 들을 때면, 내 마음은 쪼그라들곤 했다. 그들의 기대에 못 미치는 내 아이들에 대한 판단이 나를 때로는 너무 괴롭게 했다. 내가 아이들을 세상에 기준에 맞춰 키우지 못하고 있구나라는 자괴감도 들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들과 세상의 기준에 내 아이들을 내어 놓는 것이 최선인가라는 질문이 훅 하고 나에게 들어왔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 겉으로 훑어낸 시선에 내가 너무나 주저앉아있었구나 싶었다. 더 이상 아이들에게 강요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흔한 남매가 아니라 안흔한 남매를 키우는 엄마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의사가 되고 싶다는 아들에게,

"너는 누구보다 따뜻하게 공감하는 섬세한 의사가 될 거야."

외교관이 되고 싶다는 딸에게,

"너는 어떠한 상황에도 치우치지 않는 판단력으로 이성적인 외교관이 될 거야."

라고 이야기 해주었다.


아이들을 함부로 예측하지 않기로 했다. 씨앗 안에 담긴 엄청난 가능성들을 내 옹졸한 이성적 시야에 끼워 넣지 않기로 했다. 다만 더 생생하게 더 멋지게 아이들의 나중을 과장되게 그림 그려보는 습관을 갖기로 했다. 나는 이 아이들의 가까이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지켜보게 될 그 어떤 이름도 아닌 엄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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