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정확하고 매정한 ARS 목소리(전화로 합격여부를 확인하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터질 듯 쿵쾅대던 심장이 순식간에 잦아든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지난가을 11월 1차 시험을 마치고 저녁예배를 드리며 눈물 콧물을 쏟았다. (그렇다. 2007년 임용시험날은 일요일이었다.) 시험을 망쳤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남들은 잘도 붙는 시험. 왜 나만 이렇게 어려운 거야.그저 지난 1년 아니 2년 간 쏟아부었던 나의 노력과 시간이억울할뿐이다. 타고난 공부머리는 아니지만 엉덩이 싸움을 믿고 묵묵하게 앉아 앞만 보고 달려왔건만. 바지 사이즈만 두 사이즈 늘고 시험은 이렇게 망쳐버리다니. 주님, 저한테만 너무 가혹하신 것 아닌가요.
시간을 거슬러 시험 당일 새벽으로 가보자. 눈을 떴을 때 뭔가 심상치 않긴 했다. 분명히 자고 일어났는데 잔 건지 만 건지 몽롱하다. 안개 낀 물 위를 걷는 느낌이랄까. 역시나 1교시부터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정신 차려야지. 준비한 모든 것을 쏟아내야지.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본다. 볼펜을 야무지게 다시 잡아본다. 눈을 꽉 감았다가 다시 부릅뜬다.
시험장을 나오니 옆 교실에서 시험을 본 선배 언니가 보인다. 학원 모의고사랑 비슷한 문제 있었지? 막판에 그 학자 한번 더 보라고 했던 거 그거 나와서 깜짝 놀랐잖아.
응? 그런가요? 왜 난 기억이 안 나지. 시험지에 어떤 학자가 나왔는지, 무엇을 묻는 거였는지 도통 떠오르지가 않는다.
아. 데자뷔처럼 떠오른다. 수능날도 그랬다. 수탐에서 그 쉬운 2번 문제를 계산실수 하여 틀렸음을 시험지 걷기 전 손머리하고 있을 때 발견한 뒤 정신줄을 잡지 못하고. 그 이후는 왜 이리 졸린 건지. 몽롱하게 사탐, 과탐 문제를 풀었던 그날이.
이 정도면 시험과의 전쟁이다. 백 프로 지는 전쟁. 직감적으로 안 되겠다 싶은 느낌이 왔을 때 나의 뇌는 일을 멈추는 건가. 시험의 부담감을 못 이겨낸 약하디 약한 나란 존재.
사립을 나와 첫 도전을 했을 때 1차에서 0.5점 차로 떨어졌다. 아쉽지만 거의 다 왔구나. 한번 더 하면 당연히 합격일 거야. 주변에서도 너무 아깝다며 재도전을 응원해 주었다. (0.01차로도 떨어지는 경우가 수두룩 함을 훨씬 후에 알았다.) 다시 시작하려니 학원비가 제일 막막했다. 학자금을 갚고 조금씩 모아두었던 돈은 이제 다 써버렸고, 홀로 생계를 꾸려가시는 엄마한테 손 벌리기에는 염치없이 다 커버린 딸.
주일 저녁, 저녁 예배 드리고 집에 가려는데사모님(목사님 부인)께서 사택에서 차 한잔하고 가라고 부르신다. 평소 맛있는 밥도 해주시고 고민상담도 해주셔서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사택. 오늘은 어떤 맛있는 차를 주실까 하며 들어갔는데 봉투 하나를 내미신다.
00 자매, 곧 학원 등록해야 하잖아. 얼마 안 되지만 등록할 때 보태. 기도할게. 잘 될 거야.
교회 형편도 좋지 않은데 이걸 받아도 되는 건지 머리가 하얘진다. 봉투를 받아 든 손 위로 눈물방울이 톡 떨어진다. 나중에 합격하면 한턱 쏴~ 장난 섞인 사모님의 말씀에 웃음도 터지고, 눈물주머니도 터져버렸다.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에 한참을 그렇게 울고 열심히 해보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며 사택을 나왔다.
얼마 후 지인을 통해 과외자리도 하나 얻어서 돈 걱정은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이제 공부에만 집중하자. 온 우주가 나를 돕고 있다. 이제 때가 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했던 두 번째 도전이었건만 결과는 참혹했다. 합격선과 4점이나 멀어진 것이다. 올인한 친구들보다야 과외 알바 시간을 뺏겼다고는 하나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고, 그 어느 때보다 강의도 열심히 듣고, 도서관에서 오랜 시간 있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옆에서 안타깝게 지켜보던 엄마는 그래도 아쉬우니 한번만 더 도전해 보면 어떠냐 하신다.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 생각하라고.
근데, 엄마. 이젠 못하겠어.늦게나마 시험준비한다고 기도해 주시고 봉투까지 주신 사모님 볼 면목도 없고. 임용 책을 다시 펼쳐보고 싶지가 않아. 이보다 더 어떻게 공부해? 한번 더 했다가 또 떨어지면?지금도 다른 애들이랑 비교하면 난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데, 더 뒤처지면 어떻게 해. 그때는 정말 감당이 안될 것 같아. 이만큼 했으면 충분해.
"때로는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 더 큰 용기다."
포기도 용기라잖아.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다시 도전할 용기가 아니라 깨끗하게 포기하는 용기 같아.
호기롭게 시작했던 20대의 임용은 이렇게 용기로 포장하며 쓸쓸한 결말을 맞이했다.
실패는 단지 성공으로 가는 길의 일부일 뿐이다.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토니 로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