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는 장애학생이 비장애학생이에요"
한 순간도 쉽지 않았고, 내가 흘린 눈물이 한 바가지였지만, 그래도 평생 하고 싶은 일. 매력적인 나의 직업. 특수교사!
2012년 3월 2일.. 갓 특수교육과를 졸업한 새내기 기간제교사
마치 1:1 면접을 치루 듯, 학부모님 한 분께서 입학식 첫날 나와 대면한 자리에서 여쭤보신다.
“선생님, 이전 근무지는요?”
“학교는 어디 나오셨어요?”
“경력은 얼마나 됐어요?”
종이와 볼펜을 든 채 메모를 하신다. 이전 근무지도 없고, 경력도 없는 나는 대학을 갓 졸업한 생초짜 교사.
“아.. 쉽지 않겠구나!" 나는 기간제교사에 거기다 여긴 신설 특수학급. 그리고 특수교사라고는 오직 나 혼자뿐.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교육지원청 출장을 처음 간 날, 나를 만난 여러 선생님들께서 “00중학교 괜찮아요? 거기 학부모님들도 엄청 힘들고, 애들도 (중증이라) 힘들다던데?”
내 첫 근무지는 이 지역(구) 특수교사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소위 말하는 힘든 학교 중 하나였다. 타지에서 온 나는 아무것도 몰랐고 고경력 교사들이 이야기할 정도면 얼마나 힘들까 하는 마음에 걱정만 한 가득이었다.
매일매일 교실까지 찾아오시는 학부모님들을 뵈면서 긴장, 학생들이 통합학급에서 생활을 잘 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긴장감에 내 몸도 긴장을 했는지 위가 아플 정도였다.
그렇게 매일의 긴장감 속에서 생활하던 나는 스트레스만 받으면 위가 아프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나 바랬던가, 윤리교육과를 다니던 내가 특수교육과에 이끌려
“평생 기간제교사를 해도 좋으니 제발 합격만 하게 해 주세요.”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라면 제가 하게 해 주세요.”라고 간절히 염원하며 기도했던 날들.
그래서 윤리교육과에서 차석을 달리던 내가 28: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1명 뽑는 특수교육과에 편입했던 날.
분명 ‘나쁜 경험은 없다’고 했으니, 나에게 올 한 해는 아주 큰 자양분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생마음이었던 내 마음은 더 단단해질 거고, 선생님의 마음 그릇은 더 커질 거야.’
‘정성은 반드시 티가 난다’고 했어. 처음이라서 뭐든 어렵겠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잘만 해놓는다면 롤모델이 될 수 있어. 그러니깐 해보자! 나는 나의 정신력을 긍정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사실 자식을 키우는 학부모의 입장이 되어보니, 생초짜 선생님이 거기에 신설 특수학급을 운영한다는 점이 얼마나 내 아이를 맡기기가 불안하고 걱정이 되었을지, 내가 부모가 되어보니 학부모님들의 입장이 너무나 이해가 된다.)
내 나이 24살, 사회생활이 쉽지 않겠지만, 나의 열정을 보여주자! 진심은 반드시 통한다! 는 마음으로 어린 나이였던 나는 중학생들의 학교 엄마를 자처하며 교직에 첫 발을 내밀었다.
세상에 공부만 하던 대학생이었던 나는 어느새 책임감을 두둑이 짊어진 어린 학교엄마였지만, 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도 민폐 끼치기 싫어 매일 밤 10시까지 학교에 남아 신설 특수학급을 꾸렸다. 일면식 없는 인근 학교 선생님들께 공문서 작성하는 법(지금 생각해도 참 친절하신 선생님들)과 학급 경영에 대해 배우려고 퇴근 후 무조건 발로 뛰며 배웠다. 나에게 자존심과 창피함은 없었다. 무조건 빨리, 잘 배워서 우리 아이들이 안정적인 학교 생활을 하고, 학부모님들께 학교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얻는 것이 최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장애학생들이 비장애학생들이다.
우리 아이들의 사연을 들으면 가슴 찡한 이야기들이 많다. 하지만 특수교사인 나는 우리 아이들을 누구보다도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교육해야 하는 사람 중 하나다. 그게 바로 또 내가 해야 할 역할이다.
일반교사들이 비장애학생들을 대하듯, 특수교사인 나에게는 장애학생들인 우리 아이들이 비장애학생이다.
“와, 정말 대단해. 나는 절대 못할 텐데, 진짜 너무 힘들지 않아?” 내가 교사가 된 이후로, 동료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존경심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이지만 선뜻 동의하긴 어려웠다. 내 눈엔 그들이 훨씬 더 대단해 보이기 때문이다. 실은 내게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그들처럼 일반교과를 가르칠 선택지. 윤리교육을 전공했기에 윤리 선생님일 수도 있었지만 특수교사로 전향했고, 그 선택을 했던 과거의 나를 칭찬한다.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런데, 특수교사가 되지 않았다면 결코 경험하지 못했을 저마다의 개성을 가진 우리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일은 그 어떤 교사도 갖지 못할 특수교사만의 특권이다.
당시 근무하던 중학교 인근에는 공립 특수학교가 있었는데, 재학 중인 학생들 중에서는 특수학교에 가야 할 만큼 중도중복장애를 가진 학생들도 있었다. 그래서 때때로 선배 교사들은 이런 질문을 했다.
“Q. 특수학교가 바로 앞에 있는데 왜 일반학교에 보내셨대요?”
“Q. 수업 따라가기 힘든데, 여기서 뭘 배울 수 있어요?”
...
“A. 일반학교에서는 학습뿐만 아니라, 또래들과의 상호작용을 배울 수 있어요. 친구들이 노는 모습, 학교생활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 아이들은 은연중에 자연스럽게 배우게 돼요. 그리고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 작은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법도 배우게 됩니다.”
사실상, 요즘의 특수교육은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에 근거하여 특수교육대상학생들은 초중고 의무교육이고, 나 또한 큰 목소리를 내어 우리 아이들의 당연한 교육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지만, 나는 당연함을 주장하기보다 가슴에 스며드는 교육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어린 나이였지만 선생님들께 우리 아이들의 학교 엄마로서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숙이며 겸손한 마음으로 왜 특수교육이 필요한지, 왜 우리 아이들이 특수학교에 가지 않고 일반학교에 다니는지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나서까지 설명을 하고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말씀드렸다. 그리고 “학부모님의 입장에서 단 한 번이라도 생각을 해달라고.” 선생님들이 다른 학교에 가서 만날 특수교육대상학생들을 위해서라도 특수교육 및 장애인식에 대한 개선은 반드시 필요했고, 좋은 인식을 내가 심어주고 싶었던 마음이 앞섰던 것 같다.
나의 자잘한 알맹이 같은 노력들로 인해 학교의 분위기는 점점 특수학생들도 당연히 우리 학교 학생으로 인식이 점점 변해갔고, 모든 게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