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마트의 소 잡는 날. 한 달에 두 번 있는 한우 할인 행사 날이다. 평소 장바구니에 넣길 망설였던 것들이 어느 정도 합리화 되는 날이며, 갓 도축한 신선한 한우를 미적. 미각적으로도 완벽한 상태로 살 수 있는 기회다. 우리 집에는 소고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40대의 남편과 10대 두 명이 있어서, 이 행사를 놓칠 수 없다.
오늘의 목표는 한우 등심. 딸을 학교에 보낸 뒤 머리를 질끈 묶고 두 손이 자유로운 크로스백을 맨다. 기온이 갑자기 떨어진다는 일기예보에 차 키를 들었다가 잠시 생각에 잠긴다. 주차할 곳이 없어 마트를 한참뱅글뱅글 돌아야 할 상황을 생각하니, 벌써 피곤하다. 살포시 차키를 내려놓는다.
마트 앞 신호등. 현재 시간 오전 8시 57분.
‘혹시 마트 문을 안 열었으면 어떡하지? 직원들만 있고 손님은 나 혼자면 좀 창피한데, 좀 걷다 들어갈까.’
“삐리삐리 삐리삐리”
신호등이 파란 불로 바뀌며 정신이 번쩍 든다. 몸은 이미 마트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들뜬 마음으로 마트에 들어선 순간, 절로 나오는 한숨.
‘하~’
시계는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는데, 이미 길게 늘어선 줄이 눈에 들어온다. 이 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몇 시에 온 걸까? 허탈하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이상 돌아갈 수는 없다. 나도 여유로운 아침을 포기하고 달려왔으니 말이다.
줄 끝에 혼자 서서 사람들을 관찰해 본다. 모두 진지한 표정이다. 신선해 보이는 고기를 고르려는 날카로운 눈빛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이 상황이 웃기기도 하고, 낯선 할머니가 자리를 맡아달라는 부탁은 당황스럽기도 하다. 사람들은 카트나 장바구니를 꽉 쥐고, 순서를 지키며 한 발 한 발 고기 코너를 향해 간다. 그 사이 앞 줄에 선 사람들이 담아 오는 고기 봉지를 흘깃흘깃 쳐다보며 생각한다.
‘괜찮은 고기가 남아 있을까?.’
드디어 내 순서가 되어 진열대를 살펴본다. 이미 여러 손길이 닿은 흔적이 보인다. 그 가운데 가장 상태가 좋은 고기를 고르기 위해 내 눈은 분주하다. 뒤에 서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지만 이 기회를 그냥 넘길 순 없다. 대왕거북이가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가듯 열심히 기다린 시간의 결실인 만큼 최선을 다해 좋은 등심을 골라야 한다. 몇 번을 망설인 끝에 고른 등심을 들고 계산대로 향한다.
고기만 살 계획이었지만, 계산대로 오는 사이 과자와 각종 세일품목들이 카트에 담겼다. 담을 때는 몰랐지만, 계산 금액을 보니 예상보다 크게 나왔다. 결국 소고기를 제외한 나머지는 배달을 요청했다. 배달 최소 금액을 훌쩍 넘긴 건 이미 기정사실이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소 잡는 날은 내 통장이 활짝 열리는 날이다.
집에 돌아와 고기를 냉장고에 넣으며 문득 생각이 든다. '나도이제 진짜 주부가 되었구나’
예전 같으면 고기 상태를 세세히 따지지도 않고 배달시키거나 적당히 샀을 텐데, 이제는 한우 세일에 맞춰 가격을 확인하고 아침 일찍 마트로 향한다. 스스로를 돌아보니 웃기면서도 기특하다.
한우 할인 행사에서 느낀 치열함과 미묘한 경쟁은 우리 집 식탁에서도 이어진다. 구워낸 고기는 순식간에 접시에서 사라지고, 고요한 식탁에 울리는 건 남편과 아이들의 젓가락 소리뿐이다. "엄마도 먹어"라는 말 한마디 없이 각자의 속도로 고기를 집어가는 모습이 어이없으면서도 웃음이 난다. 마지막 남은 등심을 구워 식탁에 앉으려는 찰나, 밥 위에 소고기 두 점이 가지런히 얹혀 있다.
"이거 누가 한 거야?"
"내가 했어, 엄마 "
역시나 딸이다. 식어버린 등심이지만 딸의 작은 배려가 그 온기를 되찾아준다. 아빠와 오빠의 속도대로라면 엄마는 한 점도 먹지 못할 걸 알았던 모양이다. 딸 덕분에 조용히 미소 짓는다.
그날밤, 설거지를 하며 생각한다. 내가 소 잡는 날의 전쟁터에 뛰어든 이유가 여기 있구나. 이 작은 마음 하나가 나를 기꺼이 다시 달리게 한다. 딸아이의 따뜻한 손길 덕분에 이번 한우의 맛은 더 깊게 남을 것이다.